핸드폰 벨이 울린다. 낯선 번호가 뜨길래 그냥 껐다. 신호음이 계속 이어졌다. 설마 금융 사기범은 아니겠지. 통화를 하려는 순간 “어~어 엄마 살고 싶어요.” 하고 다짜고짜 울음을 터트린다. 그녀가 누구인가를 알아차렸다. 반갑기보다 궁금함이 앞선다.

몇 년 전 부산의 어느 병원 입원실이었다. 병실은 환자로 만원이었다. 나와 마주한 침상에 누워있는 젊은 아낙이 시야에 들어왔다. 꼼짝없이 누워만 있다. 척추 골절을 당한 것을 당장 알아차리지 못했다. 뼈가 붙어야 일어나지 섣불리 움직였다간 도루묵이라며 눈물을 보인다. 놀랍게도 말이 어눌하다. 이목구비도 반듯한데 뜻밖이다. 언어장애를 안고 있는 젊은 여자가 안쓰럽다. 남편과는 동거인으로 산단다. 중풍 앓는 시부모를 삼 년 넘게 모셨다고 했다. 친정 부모도 친인척도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 한 사람 여자의 버팀목이 되어줄 인맥조차 없음을 그때 알았다. 병문안 오는 사람이 들고나는 병실. 여자는 외로움에 익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외로움을 잘 삭히는가 싶어 보였다. 이어폰을 끼고 미동도 없다. 늘 혼자다. 딱 삼 주 만이다. 그녀의 남편이 나타났다. 병실의 환자들이 두 사람을 주시한다. 침상에 앉기라도 하면 보기 좋으련만 그 짓도 불사다. 한 오 분을 버티다가 그만 휙 나가고 만다. 여자의 외로움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은 한참을 봄물 든 듯 밝았다. 그 모습이 더 측은해 보였다.

병원 밥은 뻔하다며 딸이 반찬이며 과일을 자주 가져다주었다. 가져온 음식을 덜어 그의 머리맡에 두었다. 그녀의 사생활을 조금씩 알게 되자 무심할 수가 없었다. 언어장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장애도 앓고 있다. 이곳에서나마 사랑을 베풀자. 머리맡에 책을 놓아두고 읽던 수필집도 주었다. 거동이 어려워 뒤척이면 얼른 다가가 일으키고 식반도 날라다 주었다. 엄마가 된 듯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주려 애썼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침 일찍 짐을 꾸린다. 퇴원이란다.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짐을 싸는 모습이 영 아니다. 그녀의 남편이 허겁지겁 들어오더니 여자의 등을 밀고 나간다. 끌려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 환우 모두가 말이 많다. 예후가 나쁠 것을 알면서 서둘러 퇴원하는 이유는 뭘까. 다들 암묵적으로 알고는 있다. 불어나는 입원비 때문이다. 남편의 곁으로 간다는 사실에 통증도 잊었는지 얼굴 가득 화색이 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그 얼굴을 깜빡 잊고 살았다. 그 후로, 전화가 온 건 오 년만이다. 울음 섞인 말소리는 종잡을 수 없다. 가족들이 그녀를 하녀 부리듯 한다니 믿을 수가 없다. 완쾌되지 않은 몸을 신경 써 주는 가족이 없다는 것이다. 아픔을 호소해도 무시하고 타박만 준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두렵단다. 사람이 이렇게 잔인하다는 것을, 사람이 이렇게 악랄할 줄을 몰랐다고 한다. 누구보다 아픈 몸을 보호해 줄 사람은 가족이다. 그 가족이 외면한다니, 어이없다. 불안과 고통으로 떨고 있는 약자의 설움을 구해 줄 재주는 없다. 어찌하면 좋을까. 적으면 적은 대로 성심껏 돕기로 맘먹었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순간 그 생각들이 얼어붙는다. 남의 가정사에 도움은커녕 뒤로 물러앉았다. 세상일은 생각하는 만큼 간단하지 않다고 정의를 내리면서. 선의가 왜곡되어 화(禍)를 자초할 수 있다는 계산을 앞세우는 남으로 변해버렸다. 팔짱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냉정한 타인으로 변했다.

그녀와의 인연은 잠깐이었지만 각별하였다. 측은지심으로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앉았다. 사람과의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억겁의 인연이라고 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던가. 한 공간에서 밥 먹고 잠자고 부대꼈다. 그녀와 나는 몇 겁의 인연이 닿았을까. 언젠가 몸 회복해질 날이 있을 것으로 믿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내일 당장 재입원 하라고 소리쳐보지만 소용없음을 안다. 혼자 몸으로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현실의 벽에 갇혀있는 몸이다. 하소연을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버린다. 내가 베풀 수 있는 한계는 좁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지금의 처지가 안타깝다. 자칫, 한 가정의 사생활에 오지랖을 떨어 분란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은 더더욱 없다. 선의가 악의가 되고 악의가 선의가 되는 사회다. 몸을 사리는 이유가 어디 그뿐이랴.  

“엄마! 살고 싶어요.” 수화기 너머로 부르짖던 그녀.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여러 해의 겨울이 지났다. 그녀의 목소리가 끊긴 지 오래다. 부모 형제 누구 한 사람도 없다는 가여운 여자의 비명은 메아리도 슬프다. 묵은 잎 떨구고 새잎 돋는 봄이 온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부디 온전한 몸으로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하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ㅡ신희상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