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좋은 추억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가설극장'이 그렇다.옥녀봉과 국사봉 산세는 아름답다.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이다. 아양동 , 아주동, 옥포동을 감싸 안고 있다. 옥포만의 바다는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을 울리는 고장이다. 

아주당은 거북이 모양을 한 모습이다. 거기에는 기념탑과 연회루 그리고 잔디로 꾸며진 광장이 있었다. 탑 앞에는 큰 칼을 칼집에 넣어 손으로 잡고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었다. 보면 볼수록 우직하고 예리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동상이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서 나는 동상 모습처럼 자세를 잡아보기도 했었다.(고) 박정희 대통령시절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아주당은 1974년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장승포는 일제시대 때 발전기가 있었다. 저녁 6시 부터 밤 11시까지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왔다. 거제도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있었다. 장승포 항구는 밤이 되면, 전깃불 빛이 항구에 출렁이는 파도 따라 쉼 없이 춤을 추었다. 밤 11시 이후에는 불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장승포 항구를 나폴리 항구라고 말을 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폴리가 별나라에 있는지?  아니면 은하수에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장승포 항구는 국제항구라고 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흰색으로 칠한 큰 목선이 장승포 항구에 들어오고, 나가고, 정박한 모습을 보는 것이 다반사였다. 만물상회를 하는 외삼촌은 장승포에서 살고 있었다. 외삼촌에게 "저 배는 무슨 배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외삼촌은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이다." 하셨다. 나는 "무역선은 무엇을 합니까?" 하였다. 외삼촌은 " 거제도에서 잡은 생선을 배에 싣고 일본으로 간다."고 하셨다. 나는 무역선이란 단어를 잊어버릴까봐 입으로 외웠다.신부시장 근처에 영화관이 있었다. 장승포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영화관 건물 앞에 가서 영화 그림을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영화는 어떻게 할까? 그림을 어떻게 그릴까? 어떻게 들어가지? 하면서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집으로 오기를 종종 하였다.장승포에 살고 있는 또래의 말을 들어보면, 영화관 표를 구입하기 전에 엄마 치마 속에 들어가서 영화를 봤다고 자랑스럽게 말을 하는 친구가 생각이 난다.동네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밤에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영화를 보고 신작로를 걸어오는데, 두모 마을에 있는 목수간(배를 수리하고 만드는 곳)을 지나면 쓰레기 버리는 곳에서 '귀신을 보았다' 는 말을 듣기고 하고, 큰 고랑에서 '개여시를 만나서 혼쭐났다.' 고도 했다. 나는 겁이 많아서 무서웠다.관송마을 동네의 최고의 소문은 '가설극장이 열린다.' 는 것이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가설극장에 대하여 화제의 꽃을 피웠다. 영화상영 날짜만 기다렸다. 가설극장은 아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했다. 

관송마을에서 아주초등학교까지 신작로를 따라 걸으면, 약 한 시간의 거리다. 나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 날은 저녁밥을 하느라 굴뚝에서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온 동네를 덮어놓았다.동네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아주초등학교로 걸어서 갔다. 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벼워서 힘들어하거나 쉬었다가 가지 않고 곧장 갔다. 운동장에는 아양, 아주, 옥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다. 어른들이 반가워서 서로 안부를 나누는 정겨운 장소다.영화를 보려고 가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흰 천으로 가림 막을 하고, 임시로 입구를 설치하여 입장하는 사람에게 요금을 받고 들어가게 한다. 무슨 영문인지, 고등학생부터 어린이들은 못 들어가게 했다. 

기대보다 실망이 컸다. 약 한 시간을 신작로를 걸어왔는데...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에는 피로가 드리워 속눈썹이 내려온다.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나 큰 형님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극장에 들어갈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느슨한 감시 틈을 타서 천막 밑으로 잽싸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대단한 용기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 하고, 긴장이 되면서 불안했다. 긴장을 하면 소변이 마렵다. 소변을 하려고 하면 소변이 찔끔찔끔 나오다가 멈춘다.천막 밑으로 들어간 큰 형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잡혔을까? 무사했을까? 궁금했다.

집으로 오는 발걸음은 왜 이리도 무거운지 어두운 밤을 지켜주는 눈썹달만 발걸음을 재촉해 주고 있었다.가설극장은 내 기억으로 영화를 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60년도 당시에는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은 장승포 신부시장 옆 공터에서 서커스와 연극 그리고 아주초등학교에서의 가설극장이 전부였다.그리해도 그 때가 그립다. 왜냐하면, 온 동네가 입소문으로 최고의 분위기다.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가설극장이 얼마나 좋은지, 소소한 사연들은 내 맘속에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다. 그 시절은 내 어린 시절 최고의 설렘으로 지금껏 마음속을 요동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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