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면 생각난단다. 꽃 지면 생각난단다. 바람 불어도 생각난단다. 강 건너 멀리 제가 자란 친정집이 보이는 곳에서 살고 있는 내 친구 난이. 종갓집에 시집올 때부터 정짓간 옆에 있던 매화나무와 모과나무가 꽃을 피울 때면 내게 춘신(春信)을 전한다. 옹이 진 매화나무가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새하얀 꽃을 피우고, 모과나무가 상처 입은 수피를 벗으며 수줍은 듯 분홍빛 꽃을 피운 모습을, 꽃으로 수놓아진 하늘을 바라보는 난이의 얼굴과 함께 그려보곤 한다.    

고등학교 시절, 아침이면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곤 하던 난이의 편지. 어느 늦가을엔 찌그러진 오래된 양은 도시락 안에 ‘파란 하늘에 매달린 붉은 감이 마치 꽃 같더라.’란 편지와 함께 빨간 연시가 들어 있었다. 반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연시 도시락은 가슴 설레는 선물이었다. 익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뚜껑을 여는 순간, 마치 색깔 고운 정물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마음속에 소중한 한 점 그림으로 남아있다. 

또박또박 쓰기가 좋았던 백지에 까만 줄이 그어진 일반 편지지, 달이 바뀌기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마치 시화전을 하는 기분으로 썼던 그림이 멋진 달력,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써야 했던 단풍이 곱게 물든 나뭇잎, 찬바람이 불면 문에 헌 문종이를 떼어내어 새로 바르고 남은 하얀 문종이. 우리가 나눈 손편지지는 다양했다. 새하얀 문종이에 잉크를 떨어뜨릴 때면 백설이 펼쳐진 세상에 발을 디디듯 설레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살짝 전하던 쪽지는 또 어찌나 맛나던지. 나는 지금도 여행지 기념품점이나 문구점에 가면 엽서와 편지지 코너에서 서성거린다. 마음을 담아 보내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난이가 나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했다. 내가 중학교 때 지은 파우(破雨)라는 아호로 편지의 서두를 시작하기도 하고, 간밤에 신석정의 시 ‘작은 짐승’을 만난 날은 란으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를 읽은 날은 마돈나라며 불렀다. 불교학생회에서 함께 수련했기에 사리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지혜가 뛰어났던 제자다. 다문(多聞)과 암기에 뛰어난 아난존자를 따서 친구는 난이라고 불렸다. 

그냥 난이가 좋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본 적 없다. 아마도 우리는 비슷한 슬픔을 지니고 있어 저절로 끌렸던 게 아닌가 싶다. 제가 태어날 때 돌아가신,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란 난이는 할머니 손에서 컸다. 내 삶에서 손꼽을 수 있는 소중한 친구가 몇 있지만, 난이와는 슬픔의 성정이 비슷하여 인간적인 공감대가 더 깊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발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친구였다. 청춘 시절 내가 ‘선사상(禪思想)’을 읽으며 빠져 있을 때, 미용 강사로 활동 중이던 난이는 ‘직장인’이라는 잡지를 보다가 좋은 내용이 있으면 접어 두었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우린 때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난이는 내가 참 많은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허나 세월이 흘러 돌아보니 사실은 말은 제가 더 많이 했고, 나는 잘 들어준 사람이란다. 

겉엣말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지만, 속엣말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귀하다. 아무 선입감도 편견도 없이 들어주고, 어떤 이야기도 흠이 되지 않으며, 다른 곳에 뒷말을 흘리지 않는 친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좋아해 주는 친구. 사람과 사람 사이는 진실과 신뢰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간직하게 된 것은 다 친구 덕이다. 지금도 내 맘 같은 줄 알고 사람을 쉽게 믿고 좋아해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사람을 믿고 마음을 준다.

이제 내 고향엔 일가도 친척도 없다. 그래도 난이가 살고 있어서 여전히 내겐 찾아갈 수 있는 푸근한 고향이다. 난이는 직접 재배한 농작물로 만든 된장이며 간장이며 푸성귀를 챙겨주곤 한다. 봄날 장독을 열면 검은 간장물이 그리 맑아 보일 수가 없단다. 간장물에 담긴 하늘과 매화에 내 얼굴이 함께 어린다고 한다. 

우린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마음은 늘 함께한다. 통화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다. 전화를 미처 못 하면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여 그 또한 좋다고 생각한다. 때론 속 아픔을 토해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겠는 날, 친구에게 털어놓을까 하다가 나로 하여 상심할까 봐 그만둔다. 그래도 언제라도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저는 저답게, 나는 나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 친구답다고 생각한다. 

 “주야, 너는 사바세계 속에 활짝 핀 한 송이 연꽃 같아.” 
  젊은 날, 내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고 고심할 때, 난이의 따뜻한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잡아주었다. 자신의 존재감에 대하여 진정성 있는 격려를 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 있을까. 

난이는 내가 지금도 좋아하는 음악과 문학을 여전히 가까이하며, 내 색깔과 향기에 맞는 삶을 살고 있어서 너무 보기 좋단다. 진취적인 난이도 문학을 좋아하는데, 당당한 시골살이지만 힘듦을 알기에, 난이가 혹여라도 약해질까 봐 한때는 걱정스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씩씩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난이가 자랑스럽다.  

“네 삶이 진짜배기다. 나는 하찮은 재주로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입말을 하고 있지만, 너는 몸말을 하고 있잖아. 네가 먹이는 식구들, 대문간에 있는 소와 강아지며, 생활을 위해서이긴 하나 딸기며 깻잎이며 대추며, 논과 밭에 네 발길과 손길을 기다리는 말 못 하는 많은 생명을 보살피며 살리고 있잖아. 또 그 생명들은 사람들을 살리는 순환의 고리를 연결하고 있으니. 네 삶이야말로 진짜배기지. 너야말로 보살도를 행하고 있어.”   

친구란 서로 깨어 있게 하는 존재다. 순수했던 시절에 품었던 마음들이 겹겹의 세월에  바래지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한다. 친구란 기도문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나란히 늙어 간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난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들린다.  
   “나는 네가 있어 참 좋다.”
   “나도 네가 있어 참 좋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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