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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거제찬가] '둔덕 안태봉(安胎峰)'이승철:거제향토사연구가/시인/수필가/소설가/사진작가/ 전 거제시 문화재담당공무원

                        둔덕 안태봉(安胎峰) 

거제시 둔덕면 소재지 뒤 산이 안태봉(安胎峰)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안치봉이라 부른다. 안태봉은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태(胎)를 묻어둔 곳이다. 이런 풍속은 예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 까지도 있었다. 둔덕의 안태봉은 다른데 보다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 
 
고려 18대 의종왕과 관련이 있다. 의종왕이 무신(武臣) 정중부의 반란으로 목숨을 구하기 위해, 1170년 말을 타고(匹馬單身) 기성현(岐城縣)의 치소(治所)였던 둔덕면 거림리로 피신을 왔다. 왕이 둔덕으로 피신을 오자, 신복부하들과 왕비를 비롯한 가족과 궁녀들이 뒤따라오게 되었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거제 까지는 멀고 먼 길이다. 그런 길을, 왕이 말을 타고 왔으니 그 고생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 일당들이 왕을 살해 하면 민심이 동요되어 민란(民亂)이 일어 날 수 있겠다는 당시 정국의 흐름을 감안하여, 의종왕을 왕에서 폐위 시키고, 도망을 가게 길을 터 주었다. 의종왕은 죽지 않고 살아서 목숨을 구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천만 다행한 일이 었다.

  의종왕이 폐위가 되어 도망질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고을 마다 전해지자. 이 소식을 들은 고을의 원님들이 왕이 찾아오면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며칠간 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의종왕은 도망질을 하면서, 가까운 고을에 들려서 칙사 대접을 받고 쉬었다 왔지만, 거제까지 오는  되는 여러 날이 걸렸다.

  개성에서는 정중부의 반란에 왕이 도망을 갔다는 말이 전파되면서 인심이 흉흉하였다. 그럴 때 왕을 보필 하던 신하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정중부 일당들을 처단 할 계획을 꾸미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안태봉 원경

이러한 동정을 낌새챈 정중부 일당들이 의종왕의 신복부하들과 왕비들을 비롯하여 가까운 왕족들을 도망을 갈 수 있게 길을 터 주었다. 그 길이 의종왕이 도망간 거제도 였다. 의종왕은 그때 나이가 44세로 젊어서 말을 타고 올 수 있었지만 왕비를 비롯한 연약한 여인들과 신하들은 걸어서 오게 되었다. 걸어서 오면서 병에 걸리고, 굶주려 죽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오는 길마다 백성들이 나와서 먹을 것을 제공하면서 서러워하였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치다꺼리 하기는 어려웠다. 여러 달이 걸려서 도착한 곳이 의종왕이 피신하고 있는 둔덕면 거림리 였다.


   기성현청(岐城縣廳)은 의종왕을 비롯한 왕비와 신하가 사는 궁전이 되었다. 이때부터 제2의 고려국이 둔덕에 형성되었다. 개성에서 먼 거제에 도망쳐 온 의종왕은 목숨이 살았다는 기쁨과 가족과 신하가 있다는데 안도를 하면서 복위(復位)의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왕실생활이 안정되면서, 왕비가 아이를 탄생하게 되어. 태(胎)를 묻어둔 곳이 농막 뒷산이다. 태가 뭍이고부터 이 산을, 안태봉이라 했다.

 그 당시 태를 주요시 한 것은,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 태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여 관리를 하였다. 관리하는 방법은 신분의 귀천에 따라 달랐다. 그런 풍속이 왕족을 비롯하여 명문대가에서는 오래 토록 지속되었다. 

태를 별도로 묻어두게 된 것은 태어난 아이가 그 정기를 받아 잘되기 위해서 소중하게 여겼다. 귀족들은 태옹(胎瓮)에 넣어서 돌탑을 쌓아 그 속에 보존하기도 하고, 명산에 태묘(胎墓)를 쓰는데 묘를 쓸 때도 옹기그릇에 넣어서 보관한다. 그리고 태어난 날자를 그릇에 적고 묘지 밖에는 태실(胎室)의 기록을 적어 놓는다.

 태를 묻을 때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명당지에 안치 시켜서 그 운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게 한다. 왕실의 태는 아주 귀중하게 다루었다. 청자나 백자 항아리에 넣고  보호를 할 수 있는 항아리를 하나 더 쒸 운다. 그 안에 넣는 태는 불에 태워서 재를 넣기도 하고, 건조하여 말린 상태로 넣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자기들의 풍습에 따른다.

태를 묻은 묘지는 부도(浮屠)같은 구조물을 갖춘 석실에 묻는다. 태실(胎室)이 묘지처럼 꾸며진다.  둔덕 안태봉(安胎峰)에는 몆 개의 태실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주변에는 성지처럼 돌 벽이 쌓여 있다. 무지한 사람이 봐도 이 산이 명산으로 보인다. 좌청룡은 우두봉(牛頭鳳)이고 우백호는 산방산(山芳山)이다. 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동출서향(東出西向)이다. 이곳에 의종왕의 심복 빈정승(貧政丞) 묘도 있다. 왕실의 태를 편안하게 모신 안태봉에 오르면, 의종왕의 발자취가 둔덕 곳곳에 서려 있는 것을 느끼게 한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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