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먼동이 터오는 해안도로를 걷다가 쉬다 한다. 산책길엔 인적이 드물어 혼자 걸으니 호젓하면서 한결 여유롭다. 한참을 돌아 공원 한쪽 의자에 앉는다. 

상쾌한 아침이다. 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무심히 바라본 건너 산 언덕배기에 어느 사이 햇살이 환하게 비춰들었다. 푸름이 짙은 가운데 유난히 키 큰 오동나무 한 그루, 온통 보라색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저 꽃을 보면서 상념에 잠기곤 한다. 올해 역시 계절은 어김없이 내 앞에 오동나무 보라색 꽃을 가져다주었다.   

꽃을 보니 그녀가 생각난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내가 삼십 대 중반쯤인 것 같다. 남편의 직장 동료 부인이라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나보다 몇 살 위였어도 우리는 친구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 행동이 굼뜬 나와 달리 그녀는 부지런하고 애교스럽고 미소가 아름다웠다. 

그해 5월 어린이날, 우리 집 분위기는 침울하였다. 큰아이가 병약하니 나들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칭얼대는 어린것들을 달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그녀가 현관문을 밀고 들어왔다. 이웃 동네 건너 산 중턱 넓은 잔디밭에서 봄맞이 잔치가 열렸다고 구경 가잔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녀는 무조건 큰애를 둘러업고 내겐 막내를 업혔다. 얼떨결에 챙겨서 따라나섰다.

가파른 언덕길로 큰애를 번갈아 업으며 우리는 숨차게 올랐다. 징, 장구, 꽹과리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사람들은 봄의 향연을 노래하고 있었다. 아이를 잔디밭에 내려놓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땀에 흠뻑 젖은 채 큰애를 다독이며 웃고 있었다. 부모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일을.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마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린 시야에 들어 온 건너편 언덕에 우뚝 서 있는 보라색 꽃 한 덩어리가 그녀의 얼굴과 오버랩 되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내가 어려울 때마다 따뜻한 손길을 내어 주곤 했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가정에 이상 기류가 흘렀다. 남편이 오래전에 앓았던 지병이 재발하였다고 한다. 어떤 약을 써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단다. 안타까웠다.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삶을 정리하듯이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한참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허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남편이 생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그 후로 그녀의 어떤 상항도 접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당장 나설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어리고 거주하는 곳을 확실히 모르니 후일을 기약하자고 자신을 위로했다.

몇 년이 지나고 그녀가 재혼했다는 말이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왔다. 그녀와 남편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남은 삶을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해가 갔다. 그동안에 연락을 전할 수 없었던 일도 그녀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음을 증명해주었다.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언젠가는 한 번 만나 그때의 고마움을 꼭 전하고 나의 무심함을 용서받고 싶었다. 

매년 5월이면 그녀가 그립다. 푸른 하늘 높이 치솟은 오동나무 수많은 보라색 꽃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오동나무는 속이 텅 비어 악기로 만들면 좋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아무 사심 없이 마음을 내어주던 그녀의 따뜻한 품성도 오동나무를 닮은 듯하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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