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수필 : 송인각] 할머니의 방문

송인각

아들은 감기에 걸린 듯했다. 몸에 열이 나고 목이 부었다. 편도가 뚱뚱 붓는 건 어찌도 그리 나를 빼닮았는지 아들의 목구멍이 살피다 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동네의원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그러나 이번엔 편도의 염증보다도 떨어지지 않는 열이 문제였다. 우려스러울 정도로 열이 높았다. 단골 의원에서는 방문 당일에 큰 병원을 가보라는 소견을 내놓았다.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다음날 아내는 종합병원으로 아들을 데려갔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즉시 입원 절차를 밟고는 그 상황을 전화로 알려왔다. 그러면서 아들의 옷가지와 노트북을 챙겨오라 했다. 퇴근을 앞당겼다. 집안에 들어섰을 때, 사선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볕은 실내에 미치지 않았고 등을 켜지 않은 거실은 어둑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안방의 반대편에 있는 아들 방의 문을 열었다.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방문 오른편 벽면에는 옷장이 세워져 있는데 그 옷장의 끝과 방문 사이에는 얼마간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서 옷장에 바짝 붙어선 웬 할머니가 나를 쳐다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환영이나 잔상 같은 것이었다. 실체를 본 것이 아니었으니, 보았다기보다는 ‘형체를 느꼈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직접 보기라도 한 듯이 선명하게 뇌리에 맺혔다. 남루한 치마저고리에 초라한 형색이었다.

병원 급식을 먹고 아들은 침대에 앉아 노트북으로 게임을 했고 아내는 아들 옆에 앉아서 건성으로 그 게임을 쳐다보았다. 나는 병동 밖으로 나와서 촌에 계신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간단히 입원 사실을 알렸다. 말주변이 없고 별다른 용건도 없던 터라 집에서 보았던 할머니 얘기를 이어 붙였다. 재미 삼아 한 이야기였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자못 진지했다.
“할머니가 거기 가셨네. 자식들이 어떻게 사는지 돌아본다고 하셨어.”
누가 들었다면 할머니가 살아있다고 오해도 할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뚱뚱함에 가까웠던 할머니의 풍채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그 말을 흘려들었다. 아들은 입원 중에도 차도가 없었다. 겉보기는 멀쩡했지만 열은 내리지 않았다. 의사는 알 수 없다는 말과 지켜보자는 말뿐이었다.
입원 5일째, 경과를 보고하는 모양새로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킨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들었다는 얘기라 하며 ‘일주일이면 낫는다’ 했다. ‘음식에 딸려 들어 온 병’이라 했다. 나는 통화내용을 아내에게 전했다.

아내의 유별난 자식 사랑은 아들을 결벽증 환자로 만들었다. 유산 후에 귀하게 얻은 애라서 그러려니 하긴 하지만, 제 엄마 못지않게 아들의 성격 또한 유별났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도 용변을 참고 오는 날이 많았다. 막역하게 지내는 동네 이모 집에 가서는 변기가 더럽다며 사용을 거부하기도 했다. 식구끼리도 물컵이나 수저 따위의 식기구를 공유하지 않았다.
“밖에서 뭐 사 먹었어?”
아내가 물었다. 음식에서 병이 딸려 왔다는 말에 신경이 쓰였나 보다. 불량식품을 사 먹지 말라는 엄격한 계율을 안고 살았던 아들의 대답은 ‘친구가 먹어 보래서, 길에서 파는 음식을 한입 먹었다’였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지만 감염의 경로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였다. 할머니의 말에 묘한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다.

입원 6일째, 의사는 대학병원을 가보라 했다. 추천서라도 된다는 듯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건네는 메모지를 감흥 없이 받아들고 퇴원했다. 정작 우리가 찾아간 곳은 가까운 한의원이었다. 이미 어머니의 말에 안도와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그간의 일을 고자질이라도 하듯이 한의사에게 빠짐없이 늘어놓았다. 대학 시절에 연애 한 번 못하고 공부만 했을 것 같은 그 한의사는 두꺼운 양장본의 책자를 꺼내와서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중간 페이지쯤에서 멈추고는 자신이 추측하는 병을 설명했다. 유럽에서는 흔한데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병이라 했다. 누구에게나 한번은 오는 병이며 감기와 구분되지 않는다고 했고, 함께 먹는 음식문화로 인해 우리는 유아기에 감기처럼 스쳐 간다고 했다. 그 병이 확실할 것이라며, 일주일이면 낫는 병이라고 했다. 기력을 높이는 단순 한약으로 맞춤하고 나왔다.

다음날부터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빠르게 회복했다. 달여온 약을 먹으면서 살도 붙기 시작했고 성격도 털털하고 무뎌졌다. 지금의 건장함은 그때에서 비롯되었다. 상황은 모두 정리됐다. 병원에서의 처방은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발병에서 완치까지 할머니의 예언만이 홀로 빛났다. 당시 어머니는 할머니가 당신을 찾아온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꿈인지 영적인 교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궁금해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정말 다녀간 것일까.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환영은 놀랍도록 생생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느리게 논둑길을 걷는다. 손자가 뒤따라 걷는다. 어린 손자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럽다. 길이 끝나는 마을에서 할머니가 한 집으로 들어선다. 자리를 펴고 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들과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로 마당은 분주하다. 할머니와 손자가 빈자리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이윽고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잔치국수 두 그릇이 나왔다. 먼 마을 잔치에도 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다녔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허리춤에서 사탕을 꺼내 놓곤 했던 할머니였다. 나는 사소한 이유로 그런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했다.

           할머니가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는 게
           나 도무지 느껴지지 않아
           할머니가 늘 주무시던 그 자리에
           나 밤마다 이부자리를 펴 드렸었네

정연복 시 <석노마石老馬 할머니>에서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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