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78」
          벽   화

      이 덕 재

끈끈이대나물꽃
넝쿨콩이 어우러져

한땀 한땀
따박 따박
그려가는 초록걸음

담벼락
잔주름까지
품을 드는 이 풍요.

 ◎아는 것이 병
상악문치(上顎門齒)는 흔히들 말하는 대문니 이다. 두 개의 대문니 사이가 벌어진 사람을 두고 옛날에는 호랑이가 데려갈 상이라 하였고 이러한 말을 들은 사람은 혼담이 없어 애를 먹기도 했단다. 지금은 질병에 의한 사망보다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호환(虎患) 즉 호랑이에게 입는 화가 요즈음의 교통사고만큼이나 빈번했었다. 

 오늘날은 사람이 없어지면 경찰관서에 실종 신고나 가출 신고를 하고 수배를 의뢰하였지만 호랑이가 출몰하던 당시엔 온 마을 사람들이 장대 끝에 솜뭉치를 달아 불을 붙여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꽹과리나 징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수색을 하는 것이다. 놀란 호랑이가 자리를 옮겨주면 남은 시체라도 거두어 오자는 이웃사촌들의 인정이었다. 
 이러한 때엔 호랑이 때문에 산촌에서는 해 지기가 무섭게 통행이 금지되고 적막한 공포감이 마을을 뒤덮었었다.  이 같은 산마을에 하루는 池 첨지네 새 사위가 처가엘 왔다. 
 평소 池 첨지는 문자 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사위도 고르고 고른 끝에 문자 잘 쓰는 젊은이를 맞이했다. 

 새 사위가 처가에 오는 날엔 마을 사람들은 장인과 사위 간에 문자깨나 쓰겠구나 하고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池 첨지의 문자쓰기는 큰 유세 거리였기에 마을 사람들의 빈축을 샀었다 池 첨지네에 새 사위가 온 날 돼지 마리나 잡았는지 고기 냄새가 풍기는가 했는데, 그날 밤 이 마을에는 이상한 고함소리가 몹시 다급하게 울려 퍼지고 수없이 반복되었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몹시 급한 것은 분명한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왠고하니 「원산지호가 자근산래(遠山之虎 自近山來)하여 오지 장인을 착거(吾之丈人 捉去)하니, 유창자는 창지이래(有槍者 槍之以來)하고, 유궁자는 궁지이래(有弓者 弓之以來)하고 무창무궁자는 봉지이래(無槍無弓者 棒之以來)하여 오지 장인을 구지(吾之丈人 求之)하라」 고 외쳐 대니 알아들을 수 없을밖에….궁금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다음 날 아침 지 첨지 댁을 찾아가 보니 집안이 온통 울음바다였다. 간밤, 방으로 뛰어든 호랑이를 보고 기절을 했다가 아침에 정신을 차려보니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것이다. 

 화가 난 주민들이 이 사위를 묶어 관가에 끌고 가 고발을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원님은 이 선비를 꿇어앉히고 破倫을 꾸짖는다. 「이놈아, 문자를 쓸 때가 따로 있지 처부모도 부모이거늘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장인을 구해야 할 위급한 때에 촌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문자를 써서 구출을 못하게 하다니 너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하렸다. 네 놈도 오늘 밤 산중에 묶어 두어 호랑이 밥이 되게 할 것이니라」 하였다.

 그러나 이 사위는 아무 표정도 한마디의 대답도 없었다. 슬그머니 화가 난 원님은 「여봐라, 이놈을 우선 笞刑으로 다스려라」 하였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형틀에 묶인 채 볼기를 맞던 선비가 대답 반, 반 애원하기를 「아야 둔야 갱불용문자호아(我也臀也 更不用文字乎)」하지 않는가.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원님이 하도 기가 막혀 「어허 불쌍한 놈 같으니 그만 풀어 줘라. 識字가 憂患이로고…」하였다. 그 후 아는 것이 병이라는 평범한 말이 되었지만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지 첨지 사위 같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심지어는 아침에 겸상을 하고 나와서도 자기 아버지를 선친(先親)이라 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우리 慈堂께서…」하는 친구도 있으니 말이다.

   문장을 하자하니 人生識字憂患始요
   공맹을 배우려니 道若登天 不可及이로다.
   이내몸 쓸데없으니 聖代農圃 되오리다.

 (글을 읽어 문장가가 되어 볼까 해도 식자우환이란 말대로 섣불리 글을 안다는 것이 도리어 인생의 근심거리나 만드는 꼴이 될지 모르니 안 되겠다. 학문을 닦아 이름을 날려 볼까 해도 道에 이르기란 하늘에 오르는 만큼 어려우니 도무지 엄두도 안 난다. 어리석은 이 몸은 분수를 알고 그것을 지켜서 밭갈이하는 농부가 되리라.) 위의 시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안서우(安瑞羽, 1664~1735)의 유원십이곡(楡院十二曲)의 제1장이다. 안서우는 태안군수 울산부사 등을 지낸 후 무주에 살면서 산수 승경을 즐기며 은거 생활을 하였다.

 촌민이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자를 써서 장인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예를 생각해서라도 착실히 배워 정확히 쓰도록 해서 배운 탓으로 빈축을 받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남은 수명(여명)에 비례한 투표가 합리적”이라는 교수요 박사의 말, 識字憂患이 떠 올랐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 시인/게간현대시조발행인

 시조 작품 〈벽화〉는 마을 담벼락을 타고 오른 끈끈이 대나물꽃과 넝쿨콩의 모양새가 마치 벽화를 그려 놓은 양 하여 그 풍요로운 정경을 단수로 읊은 이덕재 시인의 작품이다. 벽화(壁畫)는 건물이나 동굴, 무덤 등의 벽에 그린 그림이나 벽에 걸어놓은 그림을 말한다. 〈벽화〉에서의 벽화는 하얀 마을 담벼락 아래 좁다랗게 조성된 화단에 심겨진 끈끈이대나물꽃과 넝쿨콩이 적당히 어울리어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한 폭의 벽화가 연상되어 붙여진 제목이다.

끈끈이대나물꽃은 한해 또는 두해살이풀로 유럽이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다. 줄기는 높이 50cm이고 전체에 분백색이 돌고 털이 없으며 줄기 윗부분의 마디 밑에서 점액을 분비한다. 꽃은 6~8월에 원줄기 끝부분에 가지가 갈라져 많은 꽃이 다발로 모여 피기에 낱낱의 꽃은 작아도 전체적으로는 참 화사하다.넝쿨콩은 강낭콩이라고도 한다. 넝쿨콩으로 벽을 덮으면 넝쿨콩잎이 자외선을 차단해 실내 온도를 낮추기 때문에 건물이 시원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넝쿨콩이 꽤나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구천마을 벽회

좁다란 화단에 심겨진 끈끈이대나물꽃과 넝쿨콩이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모양새를 두고 / 한땀 한땀 따박 따박 그려가는 초록걸음 / 이라 표현했다. 한땀 한땀은 수를 놓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人生을 두고도 한땀 한땀 수를 놓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겪는 것이 그대로 인생이라 하지 않던가.

 따박 따박은 또 어떤가, 따박 따박은 ‘아장아장’의 방언이다. 아장아장은 작은 몸집의 사람이나 동물이 이리저리 가볍고 천천히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끈끈이대나물꽃과 넝쿨콩을 두고 한땀 한땀 따박 따박 그려가는 초록 걸음 이란 표현에서 정감이 넘친다. 또 한 조심스럽게 이를 살펴보고 싶은 충동이 일게 한다. 그런가 했더니 담벼락 잔주름까지 초록 걸음에 품을 들었으니 점입가경이다. 어찌 풍요롭지 않으리오. 단수 시조 한 수가 안겨주는 풍요로움에 비지땀을 쏟게 하는 폭염도 만만하게 보인다. 처서가 몹시 기다려진다.―능곡 시조 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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