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84」
    '내 바램은'
(산청 백운산 산행 중)

      이규주   

나는 늘 꽃길만을 꿈꾸며 걷습니다
그러나 막상 걷는 그 길은 힘듭니다
가쁜 숨 헉헉 내쉴 때
그때 나를 봅니다.

이러니 인생이지 그러니 산길이지
골바람 살짝 부니 너무나 상쾌하고
능선에 올라서 마신
물 한모금 꿀맛이라.

헤치고 자빠지고 긁히고 진땀 빼며
오르고 내려서고 또다시 오르내려
마침내 펼쳐진 그 길
무릉도원 부럽잖네.

◎ 줏대
 옛날 강원도 어느 산골에 한 농군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기르고 있는 당나귀를 팔려고 아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장마당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길 가는 사람들이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 “왜 당나귀를 타지 않고 끌고 가는가?”하고 말하였다. 농군이 그 말을 들으니 그도 그럴듯했다. 그래서 농군은 자기 아들을 당나귀에 태우고 계속 길을 갔다.
 사람들이 또 그것을 보고 ‘에끼, 저 불효자식 늙은 애비를 태우지 않고 젊은 놈이 타고 가다니“하며 손가락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당나귀를 탔다. 그랬더니 또 사람들이 “아, 저것 좀 보시오. 애정도 없는 사람이라구. 어린 자식은 걸리우고 멀쩡한 애비만 타고 가다니… 쯧쯧”하고 수근거렸다.

 사람들의 시비가 하도 심해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당나귀를 타고 갔다. 그 모습을 보고 또 사람들이 “저런 고약한 놈을 봤나.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기로 서니 조그마한 당나귀가 불쌍하지도 않나…”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도 저도 못하여 그들은 밧줄로 당나귀의 네 다리를 꽁꽁 매어 긴 장대로 그 가운데를 꿰어 가지고 그것을 메고서 길을 갔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또 “저런 머저리들이 있나. 끌고 가면 될 텐데…” 하면서 웃어댔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웃거나 말거나 당나귀를 맨 채로 계속 가다가 개울가에 이르러 외나무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본래부터 물을 무서워하는 당나귀인지라 놀라 버드럭거리는 바람에 당나귀도 아버지도 아들도 다 같이 첨벙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한갓 우화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에게 줏대 있는 삶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마라톤을 일러 올림픽의 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 날에 치러지는 경기다. 마라톤은 그 어떠한 도구나 보조 기구도 없이 오로지 육체와 정신만으로 승부를 건다. 체중이나 나이 제한도 없고 다른 선수와 몸을 맞대고 싸울 필요도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승부다. 마라톤 선수에게 그 먼 거리를 왜 목숨을 걸고 뛰느냐고 묻는 건 우문이다. 더군다나 꼴찌를 달리는 선수에게 왜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느냐고 물을 수 없다.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줏대 있는 삶, 개성 있는 삶, 최선을 다하는 삶, 이 셋을 실천하는 사람에게서 실패는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자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다. 최선은커녕,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패배다.  “네가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므로 산대로 생각하게 되리라.”하고 어떤 사색가가 말했다. 뜻을 품지 않고 품은 뜻대로 살지 않고서는 결코 삶을 성공으로 이끌 수가 없다.

   菊花야 너는 어이 三月東風 다 보내고
   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국화의 고절을 노래한 『甁歌』에 있는 이정보(李鼎輔,1693-1766)의 작품이다. 3월 온갖 꽃이 다투어 피는 봄바람 부는 계절은 비켜서서 낙목한천에 너홀로 피었는고 아마도 서리에 꿋꿋이 이기고 섰는 것은 너 국화뿐이로구나. 선비의 높은 기개를 노래한 시로, 예부터 국화를 상하걸(霜下傑), 서리 아래 호걸이라 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초지일관 하나의 뜻을 품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실 인생 자체의 의미도 모른 체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살아간다. 작은 일에 너무 집착하다가 예기치 못한 시점에서 초라한 비석 하나를 대신 세워두고 허무하게 지나간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그리곤 영영 잊혀지고 만다. 단지 초지일관된 삶을 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죽어서도 기억되고 추앙된다. 줏대는 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을 말하며,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일컫기도 한다. 국화 피는 계절에 줏대를 생각는다. 남이 장에 간다고 따라나설 일은 아니다.
 개 네 마리가 산다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다. 네 마리의 개는 안개, 는개, 번개, 무지개다. 이 중 는개는 안개보다는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는 보슬비 같은 것이다. <이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이는 영국의 유명한 등산가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산을 오르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데 왜 그렇게 힘든 등산을 계속하십니까” “올라가면 또 내려올텐데 뭣하려 힘들게 올라가느냐” 소이부답(笑而不答)이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산이 거기에 있어서 오른다. 산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그의 답변은 이후 산악인들 사이에 그 누가 “왜 등산을 하느냐” 물으면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산악인으로서의 등산 철학이요 좌우명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늘 꽃길만을 꿈꾸며 걷습니다 /. 꽃길만 걷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오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렇던가. / 그러나 막상 걷는 그 길은 힘듭니다 /. 그렇다 힘들고 말고다. 그러다 / 가쁜 숨 헉헉 내쉴 때 그때 나를 봅니다 /. 진정한 산악인은 등산(登山, Mountain Climbing)이라 하지 않고 입산(入山, Mountaineering)이라 부른다. 산은 인간의 정복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품 넓은 산에 왜소한 내가 들어가 동화됨을 깨닫는 과정을 알게 해 준다고 하지 않던가. / 그때 나를 봅니다. /의 첫째 수 종장 결구에서 깨달음을 얻고 있는 시인을 본다.

 / 이러니 인생이지 그러니 산길이지 /. 인생과 산길의 대비가 묘한 조화를 이루어 있어 진진한 흥미가 인다. / 능선에 올라서 마신 물 한 모금 꿀맛이다 /. 꿀맛이고 말고다. 등산은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하는 단순한 과정이다. 그 단순한 과정은 바로 심신의 수양이다. 꿀맛이라는 물 한 모금, 목마를 때 마실 수 있는 ‘물 한 그릇의 행복’을 말한 김소운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고행이라면 고행이리라 / 헤치고 자빠지고 긁히고 진땀 빼며// 오르고 내려서고 또다시 오르내려 /. 최선을 다한 자의 땀방울, 눈물 그리고 그 미소보다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단다./ 마침내 펼쳐진 그 길 무릉도원 부럽잖네 /. 끝내 낙지자(樂之者)가 된 시인, 그가 부럽기만 하다. 시인은 삼성중공업 Senior Engineer이다. 그는 일하는 직업인으로 알찬 삶을 살아가기에 얼굴에 진솔함이 넘친다. <내 바램은>을 감상한 잔잔한 여운은 창밖의 빗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능곡 시조 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