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속살을 느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나를 스쳐간 것은 바람의 거죽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왜 한 번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의미, 말하지 못 하는 것들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고, 그들의 몸짓과 언어를 내가 알 지 못할 뿐이었는데 말이다.

산을 오르기엔 어중간한 시간이다. 부지런한 아낙이라면 저녁 밥물을 볼 시간이지만 길을 나섰다. 가다가 여의치 않으면 돌아서도 될 발걸음이고, 여행자의 걸음처럼 자유로운 걸음이 어디 있겠는가.

‘백련사’로 향하는 초여름의 숲은 무성하기만하다. 이름난 사찰을 찾으며 호젓함을 누리려는 마음은 접어야겠지만 해거름이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지 산을 오르는 길은 번잡스럽지 않다. 간간이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내려오는 자의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한 참을 올라가다보니 등줄기까지 땀이 흘러내린다. 내 발걸음을 따라 배음을 깔아주듯 이름 모를 새들이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오가는 발걸음에 다져져 석고처럼 단단하게 굳어있는 길.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허공으로 떠돌다 바닥으로 내려앉아 쌓이고 쌓여서인지도 모른다. 길은 막 비질을 마친 마당처럼 훤하지만 발걸음은 조심스러워 느려진다. 성근 그물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듯 나무의 뿌리가 이리저리 얽혀 땅위로 뻗어있다. 

아! 언제부터 저렇게 버티고 있었단 말인가. 건장한 남자의 혈관처럼 툭툭 불거진 나무뿌리. 애초에 겉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추어야할 은밀한 제 속을 보이고 있다. 저 빛나는 속살, 무엇으로 닦아 저렇게 반질반질 윤이 날 수 있는 것일까. 얼마나 자신을 낮추고, 무수한 발길에 밟히는 아픔을 견뎌야만 저렇게 빛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순간 날것 그대로의 나무 사리를 보았다. 분명 살아있는 사리다. 마음의 추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요동치며 흔들린다. 얼마나 버려야할까, 얼마나 비워야할까, 얼마나 닦아야하는 것일까. 답 모를 물음만이 머리를 헤집어 놓는다. 

하루 중 나를 향한 시간은 펼쳐놓은 이불의 한 쪽 귀퉁이 같았다. 늘 시간에 쫓겨 허덕였지만 그 시간의 열매는 단맛보다는 쓴맛일 때가 더 많았다. 달콤한 맛은 아쉽게도 쉽게 가시지만, 쓴맛은 혀끝에서 오래도록 남아 쉬 사라지지 않았다. 선한 진실과 진심이 늘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의 진심이 너덜너덜해 질 때는 쓰리고 아팠다. 가슴은 답답하여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까슬거렸다. 

바람이 숲을 더듬는다. 많은 인연들이 바람에 스쳐간다. 때로는 인연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슬며시 놓아버리고 싶고,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인연도 있었다. 때로는 흘러간 인연 중에 죽어라 쫓아가 붙들고 다시 되돌리고 싶었던 인연도 있었다.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 어우렁더우렁 어깨 맞대며 살아간다는 것이 아직도 내게는 쉬운 일은 아니다. 나무의 속살을 보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마군이 들끓기 시작한다. 얼마나 더 아파야 될까, 아직도 비워야 할 것이 남았더란 말인가. 아직도, 아직도……. 

눈앞이 흐려진 것은 이내 탓이라며 눈을 끔뻑여본다. 일일이 속내를 드러내며 풀지 못했던 내 마음의 매듭을 빛나는 뿌리의 속살에 내려놓는다. 나이가 들면 도드라진 성정이 무뎌질 만도 하련만, 얼마나 덮어야만 툭툭 불거진 내 성정을 누를 수 있을까. 뭉쳐있는 마음이 늦가을 나뭇잎에 아슬아슬 매달린 나뭇잎처럼 바람 한 줄기에 날아 가버리면 좋으련만. 모자라기만 한 어정잡이의 하소연이 숲을 찌른다.

메숲 사이로 황혼빛이 산길을 더듬고 있는 사이, 무성한 숲속에 슬그머니 쉼표하나 찍는다. 오솔길을 따르는 바람에 습했던 마음이 마른다. 바람의 속살이 지나갔는지 모른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