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칼럼
[황양득 황설수설28] ' 노벨 평화상 후보 '황양득:육사48기졸/전 서울대학군단교관및훈육관/에이펙아카데미 & 어학 원장

“아니 당신, 애들 좀 잘 챙겨봐요. 소영이하고 재헌이는 둘 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우리 애들은 왜 다 그 모양이에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비싼 돈 들여서 과외를 붙여 주었더니만 시집 장가부터 갈려고 하고…. 에이, 참. 재국이는 (정)도경이 없으면 안 되겠다고 그래요?” “예, 첫눈에 반한 사이라서 떼어 놓기가 좀 그래요.” “그럼 효선이는 (윤)상현이와 자주 만난다면서요?” “예, 그게 사실은 상현이는 서울대에 합격했어요. 재국이 아빠, 생도 때부터 소영이 아빠가 공부를 더 잘했다고 소영이 엄마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뒤에서 세는 것이 빠르다고.” “뭐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상임위원장 전두환은 1980년 7월 30일 교육개혁조치에 과외전면금지를 포함했다. 1961년 서울대 ROTC 창설 멤버이자 절친인 노태우의 두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고단한 필자의 유학 시절은 공부보다는 내외가 두 자녀와의 생활비 벌기가 우선순위였다. 매년 연말이면 LA 인근의 사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송년회가 부부 동반으로 열리곤 했다. 귀금속 가게를 운영하는 선배가 행사 사은품으로 반지나 목걸이를 준비했는데 필자가 사회를 보면서 매년 제일 좋은 선물은 사회자의 몫으로 챙겨 고난의 행군 같은 유학 생활을 함께하는 아내에게 그나마 선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받은 큐빅 반지는 지금도 와이프가 끼기도 하는데 다들 진짜인 줄 알고 한 번 더 눈길을 준다. 당시 송년회에서 늘 반복하는 농담이 있었다. “이심전심”이다. 이순자가 심심하면 전두환도 심심하다. 이북 출신을 비롯하여 고참의 육사 11. 12기 대선배들도 왜 그렇게 박장대소를 하는지. 생도 때나 군시절부터 앙금이 있을 수도 있고 공부도 못했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이심전심은 고소미였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전 두발 때문에 환장하겠어요!”라는 삼행시도 필요가 없었다. 9시 뉴스 시작부터 나오는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한편….” 땡전 뉴스의 추억도 새록새록 하다. 전통의 아호가 “오늘”이라는 유머에 “한편”이라는 이순자 여사의 호는 더 재미있다. 40여 년 전의 요지경 같은 세상사였지만 뒤돌아보니 언제나 추억이다. 전국 대학생 데모대의 살벌한 “독재자, 살인마” 구호는 80년대 후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이어 90년대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계보를 이었다. 이러한 미래 세대의 거센 저항에도 전통이 견뎌낼 수 있었던 숨은 응원군이 전대협이었다. 

오늘날의 샤이(shy), 전국의 대머리 협회 회원들! 80년대에는 탈모 치료제 광고가 거의 없었다. 무소불위의 전통도 머리카락에는 신경을 안 쓰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당당한 대머리로 기억되었다. 헤어미용 산업의 낙후에 큰 원인 제공자라고 하면 또 하나의 낙인인가? 하기야 예수님도 그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였지만, 대머리를 치료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경엔 대머리 선지자도 조롱의 대상이었다. 2011년 거제시 도의원 재선거에서 필자의 선거 명함 문구는 “큰머리 대머슴” 이었는데 명함을 받아본 유권자 중 다수가 “대머리 큰머슴”으로 오해하고 기억하였다. 다 전두환 때문이었다! 전통의 영향은 우리 사회 전반에 지금까지도 울리고 있다. 흔히 주변에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는 지도자나 인물에게 “0두환”이라고 표현하는 별칭이 이를 잘 역설하고 있다. 당사자들은 폄훼의 의미로 지칭하겠지만 세월은 흘러 영웅이나 영광의 대명사로 불릴 가능성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1988년 3월 일본 언론을 통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영국과 서독의 유력 의원들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고 국내에 보도되었다. 노벨 평화상은 국제적인 분쟁과 평화 이슈에 정치적인 영향이 반영되는 한시적이고 공로와 비아냥이 상존하는 정치적인 행위이며 노벨위원회의 주관적 결과물이다. 

서방의 언론과 정치인의 시각은 80년대 당시의 우리 언론과 지식인들의 판단과는 사뭇 달랐음을 보여준다. 유럽의회가 후보 추천 마감 시일을 넘겨서 재촉한 이유는 당시 대통령 단임제의 실천(1988년 2월 24일)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83년 9월 소련에 의한 KAL(대한항공)기 격추로 269명 사망, 한 달 뒤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대한민국 정부 각료와 기자 등 현장 사망만 17명, 1987년 88올림픽 취소 목적으로 KAL기를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해 탑승자 115명 전원 산화 등 군 출신 대통령이었지만 계엄령과 군사적 보복을 무기로 독재의 발판이 아닌 인내심으로 한반도 평화를 유지한 공로와 경제 발전을 선택한 업적으로 노벨 평화상에 추천되었다. 그리고 추천 이유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전임 대통령들의 독재 사슬을 끊는 용단의 단임제 공약을 지킨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행이었다. 따라서, “독재자나 살인마”는 번지수가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야 할 언젠가는 청구되어야 할 역사적 과태료다. 

1987년에 김현희에 의한 민항기(KAL) 격추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깽판으로 만들 목적이었다. 이 사건은 앞서 1986년 북한이 천명한 200억 톤 저수의 금강산댐 건설이 우리 정부의 대응책으로 평화의 댐이 전국민적 지지와 함께 진행됨을 보고 불안과 초조에서 선택한 대안적 성격의 어리석은 테러였다. 아직도 평화의 댐을 전국민적 사기극이라고 깎아내린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일부 과장되고 안보 불안을 자극하는 분위기였지만 금강산댐에 대응한 평화의 댐 건설은 군 출신 통수권자의 과단성이 집약된 결단이었다. 북한의 1986년 금강산댐 수공(水攻) 침략 계획은 1984년 9월 초 한강 유역의 대홍수로 사망과 실종 339명을 보고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남한의 기민한 대응에 굴복하여 애초의 무리한 댐 계획과 건설을 포기하였다가 1999년부터 재착공하여 2003년에 완공하였다. 

평화의 댐은 지속해서 보강 및 증축되고 저수용량과 홍수 조절의 기능이 강화되어 1987년에 첫 삽을 떤 후 19년 만에 2단계 증축공사까지 완료하였다. 5공의 업적이라 내심 못마땅한 문민정부를 비롯해 이후의 정권들은 북한의 눈치를 보면서 몰래몰래 댐의 높이를 올렸다. 전두환의 노벨 평화상 후보라는 흔적을 지우고 싶듯 평화의 댐에도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 자가 없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정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빽춘광 2023-10-07 14:18:46

    "평화의댐" ㅠㅠ
    내국민학교 시절 대놓고 삥뜯어가던 성금
    아직도 기억나네
    마이내던 아들은 선생님이 세워서
    칭찬하며 박수도 받게하고   삭제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