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90」

           가을

        강 민 진

    새벽녘 찬바람에
     쓸려간 안개구름
 
     이슬로 풀잎마다
     살그래 숨어들고

     촉촉이 
     햇살 앉은 들꽃
     가을 향기 발하네.

     설렁설렁 담을 타며
     몽실하게 맺은 호박

     여전한 뙤약볕에
     주름은 깊어가고

     산야는
     노을을 쫓는
     갈바람에 붉게 탄다.

◎밀고 밀리는 삶
어제는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회계의 날이자 할로윈데이(Halloween day) 였다. 할로윈데이는 고대 서양 켈트족 축제에서 발원하여 서양에서 즐기는 축제라는데 무슨 연유로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어 난리를 피우는지 모를 일이다. 작년의 이태원 참사는 지나친 호기심과 유행성 시류에 휩쓸려 좁은 골목에 밀려든 인파로 해서 밀고 밀리다 벌어진 참사였다.  그래서일까 낙엽도 바람에 날리는 게 아니라 밀리는 것 같았다. 

 어떤 악어농장에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그들을 보고 농장주인이 과감한 제의를 했다.  “악어가 있는 물에 뛰어들어 건너편에 살아서 도달하는 분께 10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막대한 상금이 제시되었어도 관광객들 중 아무도 뛰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누가 생명을 100만 달러와 바꾸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악어가 몰려들었고 그는 악어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무사히 건너편에 도착했다. 농장주인은 그를 가리키며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분입니다.”라고 외쳤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환호성과 함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농장주인이 약속대로 건네는 보상금을 받은 후 부부는 호텔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가이드가 그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들다니요”
 그러자 남자가
 “제가 뛰어든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나를 밀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옆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이 이야기는 해외 인터넷상에서 선동적인 인기를 모았던 글이라고 한다.
 
비슷한 얘기는 또 있었다.호화 유람선으로 이름나 있는 퀸 엘리자베스호와 버금가는 유람선 갑판 위에서는 매일 밤 음악회가 열렸다. 어느 날 밤 흥에 겨운 한 여성이 갑자기 비명 소리와 함께 바다에 추락하는 돌발 사고가 일어났다. 갑판의 높이는 10미터에 달했다. 서치라이트가 허우적거리는 여성에게로 비춰지고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였다. 한 남성이 바다로 뛰어 내렸다. 이어서 구명튜브가 던져지자 남성은 가까스로 여성을 구조했다.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영웅을 칭송하는 함성은 합창이 되었고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이윽고 갑판 위에 나타난 남성은 주변의 시선과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리번거리다 한 여성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눈을 부라리며 화난 목소리로 “왜 날 밀었냐”고 따졌다.

 이태원 참사나 악어농장에서의 일, 호화 유람선 갑판에서 벌어진 일에서는 ‘민다’는 말이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어 든든한 받침목이 되기도 하고 믿음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 것이 ‘민다’가 아니던가. 문득 <앞에서 끌어주고/뒤에서 밀며…>하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의 노래도 생각난다. 민다고 하면 그네요, 그네하면 미당 서정주의 추천사가 떠오른다.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 한 풀꽃 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서정주 ‘추천사(鞦韆詞)’, 전문

 꽃은 흔들리며 피고 우리네 인생은 밀고 밀리며 살아간다.
 부쩍 늘어난 바람에 밀리는 낙엽, 오싹 한기를 느낀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시조작품 〈가을〉은 햇살 앉아 향기 발하는 들꽃이며 갈바람에 붉게 타는 산야를 2수 연작으로 읊은 강민진 시인의 작품이다. 입동이 눈앞이라 스산한 바람 따라 낙엽이 뒹군다. 여생에서 맞이하는 가을, 마음은 애상에 젖는다.  詩聖 杜甫는 명시 ‘등고(登高)’에서 나그네 설움을 이렇게 읊었다.

    風急天高猿嘯哀 (풍급천고원소애)
    渚淸沙白鳥飛回 (저청사백조비회) 
    無邊落木蕭蕭下 (무변낙목소소하)
    不盡長江滾滾來 (부진장강곤곤내) 
    萬里悲秋常作客 (만리비추상작객) 
    百年多病獨登臺 (백년다병독등대) 
    艱難苦恨繁霜鬢 (간난고한번상빈) 
    潦倒新停濁酒杯 (요도신정탁주배) 
 바람은 세차고 하늘은 높은데 원숭이 울음소리 애달파라 맑은 물가 새하얀 모래톱에 새들이 날아돌아오네 끝없이 늘어선 나무에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그침 없는 장강은 세차게 굽이치노라 만리타향 서글픈 가을에 항상 나그네 신세구나 한평생 병 많은 몸 이끌고 홀로 누대에 오르네 곤고한 삶 탓에 귀밑머리 서리 성성한데 이제 늙고 쇠약한 몸 때문에 탁주마저 끊었노라.

 〈등고〉는 두보가 나이 56세에 중양절 (9월9일)을 맞아 높은 정자에 올라가 감상한 가을 경치를 통해 만년에 늙고 병들어 유랑하고 있는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드러낸 시로 중국 칠언율시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전체 작품을 통해 만리타향 떠돌이 신세이면서 그때 느낀 삶의 무상감과 쓸쓸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노년기에 들어선 이가 자신의 처지를 관조하며 탁주 한잔 기울이다 시름조차 풀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심정을 잘 표현한 명시라 평가받고 있다.

 찬바람 이는 새벽에 안개구름이 쓸려가고 있다. 그때 온도가 내려간 안개구름은 / 이슬로 풀잎마다 살그래 숨어들고 / 있다. 이슬의 숨어드는 모양새를 살그래라 표현했다. 살그래는 ‘남들이 모르게 살며시’란 말이니 정감이 간다. 그기다 / 촉촉이 햇살 앉은 들꽃 가을 향기 발하네./ 향기 발하는 들꽃은 산국이었지 싶다.

 담에 매달린 몽실한 호박, 이를 두고 / 설렁설렁 담을 타며 몽실하게 맺은 호박 / 이라 했다. 그 표현이 여유롭다. 호박에 내리쬐는 뙤약볕이다. 그러니 주름이 깊어질 수밖에. 남으로 내리 닿는 단풍 물결, 어느새 / 산야는 노을을 쫓는 갈바람에 붉게 탄다 /. ‘노을을 쫓는 갈바람’, 그 갈바람이 어찌나 드센지 산야가 온통 불타고 있다.고추잠자리 떼 지어 날고 癸卯年의 가을도 짙어가고 있다.- 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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