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94」
   북병산 단풍산행

     이  규  주
    가을색 곱게 물든
    북병산 오름 산길

    바람에 실려오는
    웃음소리 그댄가요

    한적한 단풍 산행길
    즐거움 가득하네.

    청명한 하늘 펼쳐
    흰 구름 유영하고

    망치만 옥색 바다
    윤슬이 찬연하니

    감성이 충만한 산길
    추억되어 새겨지네.

◎애일당(愛日堂)
 오차 없는 세월의 흐름은 어느 사이에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계절에 이르렀다. 나뭇잎이 떨어진 춥고 쓸쓸한 풍경인 낙목한천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상징인 국화를 노래한 이정보(李鼎輔, 1693~1766)의 ‘국화야 너는 어이…’의 시조에도 나오지 않던가. 요즘 들어 이곳을 관람한 사람들이 ‘어르신 후계자는 잘 두셨습니까’하고 묻곤 한다. 웬일인가 하였더니 몇 달 전에 새로 제작한 리플릿에 실린 내 모습 때문이었다. 리플릿 앞쪽에 미니장가계에 물을 주는 내 모습을 실었는데, 예사로 여기고 선택한 사진이련만 자세히 살펴보니 검버섯이며 허연 머리칼의 모양새가 누가 보아도 죽음을 눈앞에 둔 망백의 노인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나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는 강태공 같은 삶이 아니었기에 사는 게 버거워 나이를 의식하지 못한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부쩍 많아진 ‘후계자 얘기’, 거기다 갑자기 변고를 당한 주변 사람들로 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애일당(愛日堂)’이란 당호를 떠올린 것도 그런 연유였다. ‘애일’은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여생(餘生)을 헤아리는 나이이고 보면 하루하루가 어찌 소중하지 않으리오. 

 예전엔 ‘애일당’이라는 당호를 가진 집들이 꽤 있었다. 조선 중종 때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이나, 조선 중기 대학자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고택에도 애일당이 있었다. 농암은 1512년 당시 94세였던 노부(老父)를 위해 별당을 지었는데 늙은 아버지가 나이 들어감을 아쉬워하며 애일당이라는 당호로 지었다. 기씨(奇氏) 고택은 광주에서 장성으로 이어지는 국도변 너브실에 있다. 고봉은 26세 연상인 퇴계 이황과 13년에 걸쳐 서신 왕래를 하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했던 조선의 거유(巨儒)였다. 고택 내의 애일당은 비록 고봉이 살지는 않았지만 툇마루에 앉아 마당 안 연못에 드나드는 햇볕을 보고 하루가 그냥 지나가는 듯해 기운 넘치는 하루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로 허균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강릉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사천면 사천진리 인근 교산에서 태어났다. 허균의 호가 교산(蛟山)인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허균의 외가 터에도 애일당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예조 참판을 지낸 김광철(金光轍, 1493~1550)은 허균의 외조부인데 집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애일당’이란 당호를 붙였다. 애일당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으로 열려있는 모양새로 하평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산세가 흡사 이무기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산 이름을 ‘蛟山’이라고 불렀는데 허균은 이곳의 지명을 따서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지어 불렀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놀이터의 작은 동산 이름을 호로 쓴 것으로 보아 애정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애일당 인근에는 허균이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서 돌아와 다 허물어진 애일당을 고쳐 짓고 살면서 지은 시 ‘누실명(陋室銘)’의 일부를 써 놓은 ‘허균’ 시비가 있다. 전국시가건립동호회가 허균의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해 1983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작은 안내 표지판이 인색하고 가는 길이 투박하여 찾기 쉽지 않지만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비밀요새처럼 아늑한 공간이 나타나는데 그곳에 ‘허균 시비’가 있다. 시비는 키 큰 나무들이 에워싸고 주위는 대나무 숲을 이뤄 자연이 품고 보호하고 있는 것 같다.

    반 항아리 차를 거우르고
    한잡음 향 피우고
    외딴집에 누워
    건곤 고금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살지 못하려니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저.

 허균이 말하고자 한 큰 뜻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진정한 ‘애일’, 곧 하루를 아끼고 사랑함은 과욕과 집착이 아닌 청빈한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하루’, 즉 24시간=1440분=86400초는 은밀한 압축이다. 제 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세월 가는 것을 막아설 수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은 ‘애일(愛日)’을 얘기했는지 모른다.

   천 년을 헤아려 온
   이 땅의 맥박 소리

   고절한 잎새마다
   넘치는 자존이여

   단 하루 살다 떠나도
   너를 닮아 살고 싶다.
  拙詩, ‘풍란 6’, 2/2.

 나는 풍란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읊었다. 남이 무어라 해도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이성보시조시인 계간현대시조발행인

시조 작품 <북병산 단풍 산행>은 가을색이 짙은 날에 북병산을 등산하면서 느낀 감흥을 2수 연작으로 읊은 이규주 시인의 작품이다.북병산은 거제지맥 중간쯤인 거제도 남동쪽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다. 북병산(北屛山) 이름은 북녘 북(北) 병풍 병(屛)자로써 남동쪽 해변에 있는 망치마을의 북쪽을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북병산의 병풍바위는 그 위세가 웅장하고 장엄하여 보는 이를 압도 한다. 북병산의 전체적인 산세는 능선이 동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노자산, 북쪽으로는 옥녀봉과 국사봉으로 이어져 있다. 울창한 숲으로 뒤덮힌 능선에는 곳곳에 암릉이 솟아 있어 조망이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동남쪽으로 망치 몽돌 해변에서 구조라항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은 문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수묵색 정경에 빠져들면 망아(忘我)에 이르게 된다. 종주 등반을 즐기는 시인, 모르긴 하나 북병산도 몇 차례나 오르내렸지 싶다. 그것도 혼자서./ 가을색 곱게 물든 북병산 오름산길/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웃음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그대이신가’ 시인은 여쭙고 있다. 그 물음에 정감과 여유가 묻어나고 있다. /한적한 단풍 산행길 / 혼자서 걸으니 한적할 수 밖에. 그러나 그 한적한 산행길엔 즐거움이 넘치고 있다. 낭만이 충일한 가운데.

 높푸른 가을 하늘, 유영하고 있는 흰 구름은 하늘이 제 세상인양 호기롭다. 거기에 윤슬이 찬연한 옥색의 망치 바다다. 이를 바라보노라 시인은 암릉에서 떠날 줄 모르리라. / 감성이 충만한 산길 추억되어 새겨지고 있다./ <북병산 단풍 산행>은 기행 서정을 무리없이 읊었기에 편안하게 읽혀진다. 나도 종주를 한 때가 있었지 싶다. 지금은 앞동산을 오르내리기도 버거워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다. 북병산 단풍 산행을 즐기는 시인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말이다.―능곡 시조 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