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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내 고향 아양, 몽돌과 모래로 된 해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곳은 초등학교 5학년쯤에 조선소로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던 뒷산 당등산, 산성 성곽을 따라 나지막한 산 중턱에 이르면 단청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 옆으로 산봉우리로 향하는 마치 피라미드를 오르듯 150여 계단을 오르면 조그마한 옥포대첩 기념탑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도깨비가 놀러 나오고, <*개여시>가 무리 지어 살고, 산 중턱 조그만 연못가에서 신발을 빠트리면 며칠 후 산 아래 바닷가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곳이기도 했다. 파란 각시가 나오는 동굴도 있고 빨간 각시가 나오는 동굴이 있던 그 산은 나의 놀이터였다. 노랑새, 파랑새가 포구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요란하게 신방을 꾸리던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희미한 존재일 뿐이다. 언제 잊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아직도 붙잡고 있는 초라한 내 인생의 발원지이다. 오래전 정자 뒤편 어딘가에 살았을 노모와 어린 딸, 마을 사람들이 지네에게 공양한다. 제비뽑기 핑계로 가난하고 힘없는 소녀를 제물로 바치던 날, 소녀의 부엌에서 밥 짓는 동안 말동무로 먹이던 두꺼비에게 “이제는 밥을 줄 수가 없구나 ”울면서 한을 풀던 절망의 눈물. 다음날 엄청난 크기로 자란 두꺼비가 지네와 싸워 이기지만 죽고 마는 운명. 소녀는 목숨을 구하고 마을은 지네로부터 영원한 평화를 찾았다는 당산 밑 당굼터 동네 전설, 마을 사람들은 두꺼비를 후하게 장례 치른 후 지네는 여덟 토막을 내어 바다에 버렸다는 전설의 동네가 나의 발상지이다.
그 지네는 수백년이 지난 어느날 다시 깨어났다. 내가 몇 살 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마을에 이상한 역병이 번졌다. 많은 형 누나들이 갑자기 죽고 그 죽음 이후로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전설 속의 그 지네의 복수가 시작되었다는 둥 아니면 그 지독한 독이 수많은 젊음을 가져갔다는 둥 흉흉했다. 그러던 어느날 TV도 없던 시절 동네 정미소 창고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동네 이장의 안내로 모두 모였다. 어떤 활동사진인지 기억은 흐리지만 봄철에 조개를 먹지 말라는 홍보 영화였다, 아마도 보건복지부가 교육용으로 상영한 것으로 후일 기억한다. 유독 진해만 일대 어패류가 산란기인 봄철은 독소가 많아 식용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홍보 영화, 지금도 홍보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마 당시 역학 조사가 있었던 모양이고 결론이 당굼터 일대 어패류는 봄철 식용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 창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쌀자루의 매캐한 냄새, 창고 문틈 한 줄기 빛에 울렁거리는 졸린 오후의 먼지도 보이고 한껏 높은 천장도, 엉성한 콘크리트 바닥에 있던 흙냄새도 여전히 또렷하기만 하다. 창고를 조금 지나면 정미소가 있었다. 우리 동네를 통틀어 유일하게 TV가 있던 여러 칸의 기와집과 마주한 공장이었다. 어느날 산처럼 쌓여있던 왕겨와 더불어 정미소가 불에 타던 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화마를 보면서 껄껄 웃던 그분의 뒷모습, “잘 탄다. 허허 내 모든 게 타네” 허탈한 웃음을 짓던 그분, 코흘리개 꼬마가 보기에도 대단한 분이라 생각했던 그 순간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난 아직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기억은 평형 저울 위에 놓인 두 개의 공처럼 느껴진다. <*라부아지에>의 저울처럼 기억해야 할 총량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어릴 적 갑자기 몰락한 고향이 지금 나에게 짧은 기억을 더 선명히 하라 요구하는 듯하여 가슴 시리다. 소중한 것들이 많이도 잊혀져 갔고 몰락하여갔다. 슬픈 추억이다. 그래서 더 아리게 부둥켜안는지도 모른다. 기억은 샴페인 잔 속의 스파클링처럼 치열하게 용솟음친다. 이제는 헤아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잊혀져 간 사람들, 빨간 원피스에 빨간 여행 캐리어를 들고 빢빢 깎은 까까머리 개구쟁이 앞에 섰던 소녀도, 황금 달빛 일렁이는 파도 틈으로 밀리고 쓸리는 조약돌 소리를 함께 듣던 풋풋한 청춘도 있었다. 고향의 몰락과 함께 상실되어간 숱한 것들을 기억하고 회상해야 비로소 치열한 기억의 스파클링을 기화시키고 이제는 멈출 수 있을 것이다.
*. 개여시 : 늑대와 여우의 중간 외향을 가진 늑대와 유사한 야생동물
*. 라부아지에 : 프랑스 화학자, 그는 실험을 통해 질량보존의 법칙을 증명하였다.
*. 질량 보존의 법칙 :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은 서로 같다는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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