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209」

        할미꽃

     심 옥 배

   그리움 뱉어내고
   향기를 삼키는 꽃

   보랏빛 고운 자태
   무덤이나 지키는 꽃

   솔숲을 곁에 두고도
   허리 펴지 않는 꽃.

   따사론 햇살 아래
   눈이나 비비는 꽃

   솔바람 꼬드겨도
   옷깃만 여미는 꽃

   파르르 눈썹 떨면서
   그만 잠이 드는 꽃

  ◎혼자 웃는 웃음(獨笑)•2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와 여유당(與猶堂)을 짓고 살았지만, 다음 해에 18년간의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당파싸움은 계속되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 이승훈 등과 형인 약전(若銓) 아우인 약종(若鍾)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 전남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이곳에서 다산은 처참한 유배 생활 속에서도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하고자 했다. 

 그는 피폐한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통해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산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에 가까운 인물로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원화성의 건축을 주도했으며 기중기를 고안하여 근대적 건축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다산 초당은 1808년 봄부터 머문 곳으로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다산 초당은 관광유적지가 되었지만, 단순히 넓게 퍼진 강진만 바다가 보이는 곳이 아니라 한 인생의 포부가 짓밟힌 한 맺힌 곳이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로지 학문을 연마했다. 다산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廣州),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여기에 다산의 생가 여유당이 있다. 여기서 돌아가실 때까지 숨도 안 쉬고 살았다고 한다. 여유당(與猶堂)은 노자(老子) 도덕경의 한 구절로 ‘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 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인 43세에 인생의 모순과 한계에 대해 독소(獨笑)라는 시를 남겼다

   살림이 넉넉하여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자식이 많은 집엔 가난하여 굶주림이 있다네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재주 있는 인재는 재주 펼칠 길 없다
   완전한 복(福)을 갖춘 집은 드물고
   지극한 도(道)는 쇠퇴하기 마련이니
   부모가 절약하여 모은 재산은 자식이 탕진하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짓을 한다
   보름달 뜨는 날은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댄다.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나 홀로 웃는 까닭을 누가 알아 주리오.

   有粟無人食(유속무인식)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達官必憃愚(달관필창우)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至道常陵遲(지도상능지)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婦慧郎必癡(부혜낭필치)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인생이란 우리네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가 하면 두루 공평하기도 하다. 요즘 세태를 예언이라도 한 것 같기만 한데, 다산 선생이 홀로 웃는 까닭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저수지에 풀어 놓은 새끼 오리 수십 마리
   허구한 날 잠방잠방 비늘 뜨며 붓는 몸통
   떼지은 돈의 행렬에 해가 지고 달이 뜬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몸집이 집동 같다
   포개진 사료 자루 배보다 더 큰 배꼽
   벌어진 오차의 거리 五里보다 더 멀어라.

   ‘인생은 돈’이라는 아내의 긴한 설법
   뒤늦은 오리 사육 뒤뚱뒤뚱 나의 행보
   본전은 먹어 치우고 꽥꽥 우는 오리 오리.
             拙詩 ‘돈과 오리’, 전문

 아내의 핀잔을 듣다 말고 나도 홀로 웃었다. 머잖아 벚꽃이 필 것 같다.(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이성보시조시인 계간현대시조발행인

시조 작품 <할미꽃>은 따사론 햇살 아래 다소곳 피어난 할미꽃을 두고 그 정경을 2수 연작으로 따사롭게 읊은 심옥배 시인의 작품이다. 할미꽃은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른 봄 하얀 털이 보송보송한 할미꽃을 보노라면 이름 그대로 생전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전설 하나만 소개하여 본다.
 자식 잃고 손녀만 셋을 둔 할머니가 그 손녀들을 차례로 시집을 보냈다. 첫째는 부잣집으로, 둘째는 양반집으로 시집을 갔지만 셋째는 가난한 농사꾼 집에 시집을 갔다. 어느 날 손녀들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선 할머니는 첫째 집에서 밥 한 그릇을 주고 얼른 가라고 했고, 둘째는 쫓아내듯 대문 밖으로 떠밀었다. 할머니는 할 수 없이 셋째 손녀한테 가기로 했지만 너무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다음 해 봄 할머니가 쓰러졌던 곳에 할머니의 꼬부라진 허리처럼 꽃대가 구부러진 꽃이 피니 사람들은 이 꽃을 할미꽃이라 불렀다고 한다. 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며 노고초(老姑草)라고도 불린다. 주로 관상용이고 뿌리는 약용으로 쓰인다. 꽃말은 ‘슬픔’ ‘추억’ ‘슬픈 추억’ 등 하나같이 애잔하다. 예전에 할미꽃은 흔하게 볼 수 있었으나 요즘은 찾아보기가 꽤 힘들다.
 나에게도 할미꽃엔 아픈 추억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얼추 25년 전 일이다.
 남해에 있는 하준호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흰할미꽃을 만났는데 증식해서 몇 포기 보내 주겠다는 전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할미꽃 몇 뿌리를 택배로 보내왔다. 정성껏 심었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싹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 하준호 형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미꽃 얘기를 했더니 돌아가시기 전에 지인들에게 흰할미꽃 뿌리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채란에 빠져 전국을 누비던 날 남해에서 하준호 형을 만났다. 자생란 보존회 같은 회원이었던 형은 남일여객에 근무하였던 터라 낮엔 시간이 없어 밤중에 후레쉬를 들고 동네 뒷산에서 소심(素心)을 캐고선 화제가 되었던 애란인이었다. 형의 얘기를 ‘난과생활’지에 필자가 연재하였던 <한국란채집기>에 소개하기도 했었다.

 솔숲을 곁에 둔 야산 언덕배기에서 시인은 할미꽃을 만났지 싶다. 시인이 만난 할미꽃은 / 그리움 뱉어내고 향기를 삼키는 꽃 /이었다.손녀를 그리는 할머니. 그 절절한 그리움을 향기를 삼키는 꽃으로 표현했다. 그런가 하면 / 보랏빛 고운 자태 무덤이나 지키는 꽃 // 솔숲을 곁에 두고도 허리 펴지 않는 꽃 / 이라고 했으니 초·중·종장에 꽃을 등장시킨 솜씨가 예사롭지 아니하다.

 봄 햇살은 따사로워 어느 사이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다. / 따사론 햇살 아래 / 밀려온 졸음 때문에 / 눈이나 비비는 꽃 / 라고 했으니 다소곳 머리 숙인 정경이 사뭇 가슴 저리게 한다. 솔숲에서 이는 바람이 솔바람이다. 그것도 봄날에 이는 봄바람일지니 / 솔바람 꼬드겨도 옷깃만 여미는 꽃 / 일진데 어디 흐트러짐이 있으리오. 하얀 털이 가득한 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그만 잠이 드는 꽃, 그 할미꽃은 순수하기 그지없다. ‘삼키는 꽃’, ‘지키는 꽃’, ‘펴지 않는 꽃’, ‘비비는 꽃’, ‘여미는 꽃’, ‘잠이 드는 꽃’ 등 시인의 심미안에 찬사를 보내며 춘분을 기다린다. 시인의 첫 시조집 「별 그리며 머무는 달」 상재를 축하드리며 文彩가 더욱 빛나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능곡 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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