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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홍춘희] '애증의 섬 대마도'홍춘희)대구교대수학과졸/영남대교육대학원상담심리전공/한세대교육대학원특수교육전공/초등교교사27년재직/휴스턴한인학교한글교사/브라질리우데자네이로한글학교교장/눌산교실수강

                           애증의 섬 대마도
                                                             홍춘희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우리와 함께 해온 섬이다. 일본 본토와 한국 사이에서 정치적으로는 일본에, 경제적으로 식량 확보를 위해 조선에 의지하여 생존해 온 섬이다. 애증의 관계에 있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부산과의 최단 거리는 약 49.5㎞이다. 부산 울산 거제도 통영 미륵산 전망대 창원해양공원에서 날씨가 좋은 날 육안으로 대마도를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국책사업인 팔만대장경 일부를 안전하다고 생각한 쓰시마에 보관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쓰시마섬은 후쿠오카가 아닌 부산과 같은 경제권이었다. 지금도 대마도 주민들이 배를 타고 부산으로 쇼핑하러 온다고 한다. 부산시민들도 당일 코스로 대마도로 쇼핑을 간다. 대마도의 경제는 한국인 관광객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마도 히타카츠에 입항한 니나호

어둑한 새벽에 출발하여 부산 국제여객선 터미널 앞에 도착하여 일출을 보았다. 겨울이라 7시가 넘어서 해가 떴다. 태양은 우리가 타고 갈 배 뒤 먼바다 위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구름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페라떼의 부드러움을 느낄 때 붉은 기운은 점점 옅어지며 부산 앞바다는 실체를 드러내었다. 출국 수속 후 대마도행 배에 올랐다. 부산항을 뒤로 하고 배가 나아간다. 부산대교는 날렵한 다이아몬드 교각을 드러내며 다리 상판을 걸고 있다. 멀리 오륙도가 뒤로 물러나고 있다. 엔진 소리 요란하다. 잔잔한 파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파도의 끝은 짙푸른 용의 비늘처럼 날카롭게 꿈틀댄다. 용의 비늘 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살짝 겁이 난다. 한동안 바다 위를 바라보며 벗어날 수 없다는 고립감을 느낀다. 창문 너머 짙푸른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투시안이라도 있는 듯 바다 아래에 있을 생명체들의 존재와 그 생명체들을 품어주는 엄마같은 바다를 상상해 본다. 두려운 존재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생각해 본다.

미우대 해수욕장(일본 100대 해수욕장 선정)

일제강점기 현해탄을 건너다 몸을 날린 윤심덕이 떠 오른다. 그녀의 호는 수선(水仙)이다. 도쿄 음악 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국내로 돌아와 순회공연을 하며 성악가로 명성을 이어갔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을 한 후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연락선에 탑승했다. 1926년 새벽 4시 대마도를 지나던 중 김우진과 함께 투신하였다. 배를 멈추고 시신을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순탄하지 못했던 삶의 무게가 생을 마무리하게 만들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이렇게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인 사의 찬미를 노래하며 미련없이 몸을 날렸을 것이다. 그녀의 나이 29세였다. 꿈을 펼치지 못한 젊은 청춘이 사라졌다. 유럽으로 유학 가고 싶었던 윤심덕은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의 인생마저 접어버렸다. 윤심덕의 인생에 빠져 있다보니 일본 근해가 가까워지고 조업하는 일본 어선들이 보였다. 

하치만구신사(이즈하라 소재)

드디어 대마도 히타카츠에 입항하였다. 입국 수속 후 대마도 땅을 밟았다. 세관에 근무하던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 외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마도의 첫 느낌은 시간이 멈춰진 섬 같다. 깨끗하고 조용한 일본의 어촌 마을이다. 섬 면적의 대부분인 80~90%가 해발고도 400m 이상의 산지여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한정적이다. 유인도 5곳을 포함해 부속 섬이 100여 곳이 있으며 2020년 현재 인구가 28,502명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새벽부터 자동차와 배를 타고 왔더니 배도 고프다.  점심으로 근처 식당에 가서 일본식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히타가츠 항구 주변을 걸었으나 한국인 관광객 이외에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이즈하라로 이동하였다. 일본차는 우리나라와 반대로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스, 택시와 같은 대중교통은 불편하다. 이즈하라에서 히타카츠까지 남북으로 연결하는 382번 국도가 쓰시마의 주요도로이나 도로 폭이 좁고 급커브 급경사가 많다.

돌지붕 휴게실

 쓰시마의 시화는 진달래이고 시목은 이팝나무이며 시조는 고려꿩이라고 한다. 고려꿩은 17세기 조선에서 유입되었으며 수꿩의 목둘레에 흰 띠가 있어 일본 본토의 꿩과 다르다. 진달래는 일본 본토와 다르게 옅은 핑크색으로섬전체에분포하고있다. 와니우라지구는5월 초 3000 그루의 이팝나무가 흰 꽃을 피운다. 한국전망대 건너편은 이팝나무 자생지로 축제가 열리는데 그 옆의 오우라 포구에서는 500여 년 전 700여 척의 배가 전쟁을 위해 조선으로 출발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쓰시마 야마네코는 쓰시마에서만 서식하는 야생 고양이이다. 꼬리가 크고 이마와 미간에 세로줄이 있다. 여름에는 털 전체가 검지만 겨울에는 머리 부분이 회백색으로 변한다.

크기가 작은 편이고 초식을 한다. 쓰시마 야생생물 보호 센터에서는 희소 야생동물인 야마네코를 볼 수 있다. 쓰시마는 일본계 동식물뿐 아니라 대륙계 남방계 동식물이 함께 서식하고 있다. 다이슈바는 대마도 재래종 말로 키는 130㎝ 정도로 작으나 힘이 세고 발굽도 튼튼하다. 큰 짐을 싣고 험준한 산을 잘 걸어 쓰시마의 운송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쓰시마의 주요 임산물은 목재, 표고버섯, 목탄이다. 표고버섯은 나가사키현 생산의 98%를 쓰시마에서 생산한다고 한다. 편백나무가 유명하다. 일본에서 편백나무를 가져와 거제에 많이 심었다. 농산물은 생산이 부족하여 섬 밖에서 들여오고 있다. 쓰시마의 기간 산업은 어업이다. 오징어, 전복 소라 등의 해산물도 풍부하며 다이쇼 시대1912~1926 이후에는 쓰시마 아소만을 중심으로 진주 양식을 한다고 한다. 도자기와 타일의 원료가 되는 도석류의 일본 3대 생산지 중 한 곳이다. 

히노키 나무

 대마도는 아리아케, 시라타케, 미타케, 타테라야마산이 등산 코스로 인기가 있다. 아리아케산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길로 되어있어 걷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시라타케 산은 미쓰시마마치에 있고 높이가 519m이다. 원시림이 정상까지 잘 보존되어 있고 정상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미타케산은 야마네코 서식지로 배설물을 쉽게 찾을 수 있고 거대한 딱따구리 키타타키가 서식하고 독자적인 생물 분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테라야마 산과 야타테야마 산은 이즈하라마치이즈하라면 남부에 있으며 나무의 평균 수령은 200년으로 거대한 스다지이, 시이노키나무 볼 수 있고 떡갈나무, 메밀잣밤나무 등 난대계 수목이 서식한다. 모기하마 해수욕장은 쓰시마 최대의 모래 해변으로 길이가 400m이고 수심이 얕으며 쓰시마에서 유일하게 바다거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미우다 해수욕장은 일본 100대 해수욕장으로 선정될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쓰시마에서 보기 드문 천연백사장으로 애메랄드 빛 바다가 포근하게 느껴진다. 이쿠치하마 해수욕장에는 한국 남해안의 쓰레기가 해류를 타고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오우라비치는 몽돌해수욕장이다.

다테이타성의 홍매

쓰시마는 리아스식 해안의 절경을 볼 수 있어 전망대가 많다. 해발 176m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는 쓰시마 아소만의 북쪽 해안에 있어 360도 바다를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동쪽으로는 쓰시마 해협이 서쪽으로는 대한해협이 펼쳐지며 가까이로는 복잡한 해안선과 무수한 섬들로 이루어진 리아스식 해안을 볼 수 있다. 겹겹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구름이 감돌아 흐르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국 전망대는 서울의 파고다 공원을 모델로 건축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대마도로 잡혀 온 우리 선조들이 명절 때가 되면 이곳에 올라와 바다 건너 고향 땅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운하건설이나 포대 건설에서 노역을 하며 고향을 지척에 두고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다. 센뵤우마키야마 전망대는 정상이 넓고 평평한 초원이며 풍력발전소가 있다. 보리와 메밀 씨를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산이라는 뜻이다. 이국이 보이는 전망대는 맑은 날 광안대교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곤겐야마 전망대는 미우라 해변과 히타카츠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만제키 전망대는 아소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앞으로는 시라다케와 아리아케 산의 능선이 보인다.   

만제키바시에서 내려다 본 만관세토

토노사키 공원은 1905년 도고헤이하치로 일본함대 사령관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침시켜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러시아 발틱함대는 뤼순항을 구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항해하여 오다가 뤼순항 함락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벽 무렵 러시아 병원선의 불빛이 노출되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러시아함대 3척만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하고 발틱 함대는 전멸하였으며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포로로 잡혔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인 간섭의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한국 침략이 더 가까워졌다. 그들은 승리를 기념하는 공원이지만 우리는 국권 상실을 예감하는 공원이다. 오메가 공원은 높이 455m의 오메가 대철탑이 있었던 장소이다. 오메가 항법 시스템 도입으로 75년에 완공하여 선박이나 항공기의 위치 확인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97년 해체되었다. 지금은 통신위성의 발달로 GPS가 그 일을 담당한다. 대철탑의 일부를 기념구조물로 공원을 만들었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은 화강암반이 넓게 펼쳐져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대마도에도 신사가 많이 있다. 하치만구 신사로 이동하였다. 일본 천황을 모시는 이즈하라의 하치만구 신사 경내에는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그 아들을 기리는 신사도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권력 다툼에서 패하고 참수당한 후 딸은 이혼을 당하였다. 나가사키로 추방되어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대마도 주민은 그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신사를 만들었다. 신사에 들어가는 문은 도리이다. 문은 천天과 문門이 합쳐진 형상이라고 하는데 문에 새가 있는 것은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사에는 데미즈야라는 손을 씻는 곳이 있어 들어가기 전에 입과 손을 깨끗이 씻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와타즈미 신사는 바다의 신 도요타마히메 미코토를 모신 해궁이다. 바다의 신인 용왕이 수중 도리와 육지의 도리를 통과하여 신전에 들어왔다고 믿었다. 이 신사에 5개의 도리가 있는데 인간이 5옥에서 해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코모타하마 신사는 이즈하라 북쪽 바닷가에 있다. 1274년 여몽 연합군이 사스우라

미우대 해수욕장(일본 100대 해수욕장 선정

에 입항하여 쓰시마 소의 함선과 군사를 전멸시켰다. 이에 일본에서는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신사에 모시고 있다. 다쿠즈타마多久頭魂 신사는 대마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도리 오른쪽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다카미무스비 신사와 지장당 관음당과 같은 불교당이 있다. 타카미무스비高御魂는 일본의 최고계급의 신이며 창조신이다. 

토노쿠비 고분은 BC1~2세기 야요이 시대 후기의 상자식 석관으로 각종 장신구와 청동 거울 청동창 한국의 무문토기가 출토되었으며 토기의 토질이 가야라고 한다. 가야식 무덤으로 일본인보다 훨씬 키가 커 한국인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5세기경부터 한반도인의 대마도 이주가 시작되었고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가 가야로부터 대마도에 전해졌으며 3세기에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대마도에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3세기 중엽 변한으로부터 철로 된 정이 들어왔고 5세기에 가야에서 철제농기구가 유입되어 농업이 발

전하였다고 한다. 쓰시마에는 신라와 관련된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신라인의 조상을 모시던 사당, 신라 언어의 흔적, 신라 후손이 사는 신라마을의 흔적도 있다고 한다. 친구라는 단어는 쓰시마에서도 친구이다. 663년 백제의 백촌강 전투에 야마토국이 참전하였으나 나당연합군에 패배하여 후퇴하였다. 일본의 최전방이 된 쓰시마에 신라의 진출을 막기 위해 가네다 성을 해발 276m의 성산 정상에 쌓았다. 성문과 수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한국의 산성 쌓는 양식으로 쌓였다. 높이 2~3m, 길이 5.4km의 성벽 흔적이 멀리서도 잘 보인다. 각지에 조선식 산성을 쌓아 올려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대마도의 고대 산성인 가네다성이 일본 최강의 성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대마도 5대 도주는 고려 만호로서 공민왕으로부터 백미 천 석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원통사엔쯔지는 불교사찰로 조선통신사 이예의 공적비가 있다. 원통사 창건시 조선에서 선물로 받은 종이 있다. 개성 연복사 종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조선 초기 종으로 보인다. 본존불은 고려 금동약사여래불이다. 왼손에는 약병을 들고 오른손에는 가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모으고 가부좌를 틀고 있다. 옷의 주름은 간소하게 정리되어 있고 옅은 붉은 색을 띠는 도금은 잘 남아있다. 신라 불상의 형식을 이어받은 고려 불상으로 확인된다. 고려의 초조대장경 인쇄본은 11세기 초에 국가사업으로 인쇄하였으나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우리나라에 200권, 교토 남선사와 이끼섬에 일부 보관되고 있다. 황백현 박사는 이 목판인쇄본은 일본이 가져간 것이 아니라 고려가 고려권 안에 있는 대마도에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막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대마도는 조선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쓰시마를 방문하여 와니우라 포구의 이팝나무 하얀 꽃을 보고 감탄만 하고 오면 안 된다. 그 옆의 오우라 포구에서 조선 침략을 위해 일본 전함 700여 척이 집결하여 부산으로 진격을 시작했던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북쪽으로 좁고 긴 만이 이어져 포구는 호수처럼 보인다.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대마도가 있었다. 432년 전 봄날 일본 전역에서 온 배들이 오우라에 입항했다. 그해 5월 23일 새벽 이팝나무꽃이 흩날리던 날, 1만 8000명이 넘는 일본군이 승선한 배들은 일제히 좁은 오우라 만을 빠져나갔다. 대장선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선봉에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타고 있었다. 운명의 그날, 부산 첨사 정발은 영도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오후 적선이 바다 위로 몰려왔다. 당시 조선에 출몰하는 왜구를 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쌀을 받아 가기 위해 조선에 조공선을 보내고 있었다. 정발은 조공하러 오는 왜인들로 생각하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진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왜군이 성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정발은 비 오듯 쏘아대는 포 속에 서문西門을 지키다가 화살이 부족하여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동래성 문이 뚫리고 성안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성이 함락될 무렵 일본 무장은 송상

현 동래부사에게 도주를 권했다. 송상현은 전쟁 전 사신으로 조선에 자주 온 일본 무장과 아는 사이였다. 그는 관복을 갖춰 입은 뒤 북쪽을 향해 앉았다. 일본군 병사 하나가 송상현을 죽였다. 일본 장수는 탄식하며 시신을 묻어 주었고 송상현을 죽인 일본 병사도 죽였다고 한다. 반나절 만에 전투가 종료됐다. 지난 2005년 5월 부산 지하철 수안역 공사 중 동래성 전투 때 희생당한 사람들 유골이 대거 발굴됐다.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이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게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고 외무부에서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2010년 국회 의원 37명은 대마도는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우리 영토임이 분명하다며 일본이 불법으로 강점하고 있는 대마도를 조속히 반환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버스는 남쪽으로 가다가 소선월에 도착하였다. 소선월고후나

고시은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던 요충지이다. 동쪽 바다에서 작은 배를 서쪽 바다로 밀어 넘겨서 한반도와 대륙으로 향했다고 한다. 최저 해발지역으로 육지의 폭이 174m이다.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이 이곳을 통과하여 본토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을 선월포船越浦 선월船越이라고도 불린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은 이곳에서 내륙으로 도망간 왜구에 대비하여 방책을 치고 왜구를 수색하고 잡혀온 조선인과 중국인을 구출하였다. 대마도주는 이곳에서 이종무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1672년 에도시대 때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大船越라는 운하를 만들어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졌다. 1901년 대륙 정복의 야욕에 대비하여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관세토라는 운하를 만들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 순사 13명이 죽은 것에 대해 제물포조약을 맺고 배상금을 조선으로부터 받아 운하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1996년에 이 운하의 위에 만관교만제키바시라는 다리가 건설되었다. 만제키세토에 놓인 만제키바시를 기준으로 북쪽을 가미지마上島, 남쪽을 시모지마下島로 부른다. 수선사슈젠지는 유마경 읽는 방법을 왜에 전했다는 백제의 비구니 법명法明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절로 최익현 순국비가 있으나 사유지라서 볼 수 없다. 최익현은 구한말 유학자로 항일 구국 투쟁의 상징적 존재이다. 을사조약을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일본군에 의해 쓰시마에 끌려간 뒤 일본의 것은 먹지도 입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며 31일간의 단식 후 순국하였다. 서산사西山寺는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영빈관이었으나 지금은 숙박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경내에는 1589년 통신사에서 부사로 임명된 김성일의 시비와 고려 불상이 있다.

 한국전망대 근처에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비가 건립되어 있다. 1703년 부산항을 출발한 108명의 통역관 일행이 탄 배가 와나우라 앞바다에서 기상 악화로 좌초되어 전원이 사망하는 해난사고가 발생하였다. 21대 대마도주를 조문하고 22대 대마도주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오는 중이었다고 한다. 1991년 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난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추모비를 세웠다. 1459년에도 통신사 정사 송처겸이 탄 배는 실종되고 부사 이종실이 탄 배가 전복되었다. 일행 90명 중 한을이라는 사람만 대마도 해안으로 표류되어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가미아가타마치 사고만에는 박제상 순국비가 있다. 신라 실성왕 원년인 402년 일본과 통교 관계에 있었으며 왜왕이 볼모를 요구하자 내물왕의 아들 마사흔을 보냈다. 그 후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왕이 즉위하고 동생인 마사흔의 귀환이 늦어지자 박제상을 왜에 보내어 왕자의 환국을 요구하였다. 박제상은 왕자를 탈출시키고 본인은 일본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부인은 울산 치술령 꼭대기에 올라가 대마도를 바라보고 박제상을 기다리며 한탄하니 비둘기가 부인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부인은 “비둘기야, 너는 대마도로 날아가 우리 낭군 보건마는 나는 언제 낭군님을 만나볼까”라고 말하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즈하라의 가네이시성터로 가는 길에 조선통신사 접우지비라는 비석이 있었다. 1811년에는 에도에서 조선통신사를 영접하기 위하여 접반사가 왔다는 비석이다. 접반사란 일본 본토에서 조선통신사를 영접하기 위해 나온 관리이다. 조선통신사란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을 가리킨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양국의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이

가네이성 오테

후 실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시도했다. 양국의 관계 수복을 위해 끈질기게 조선과 교섭한 결과 1607년 조선통신사가 파견되면서 국교가 회복된다. 1811년까지 12차례에 260여 년간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학술 예술 산업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교류하며 선진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였다. 한양에 서 출발한 사절단 일행은 부산을 거쳐 쓰시마에 상륙한 뒤 다시 세토 일본 내해를 거쳐 에도에 도착하였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일본의 끝없는 요구에 통신사를 파견한 우리 조상들이야말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화려한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의 길이는 16.58m이다. 이것을 포함하여 양국의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 111건 333점이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통신사들은 인삼, 청심원,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호피 등을 가지고 갔고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등을 가지고 왔다. 당시 일본은 정성을 다해 통신사에게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의 글을 받기 위해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매년 8월에 쓰시마 이즈하라항 축제에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가 있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약 300~400여 명이 행렬에 참여한다고 한다. 역관사는 통역 번역을 하는 사신이고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에 파견한 특사이고 1609년 기유조약 이후 파견한 특사는 조선국 통신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문호개방 이후 이러한 통신사 영접을 중단했다. 그들은 더 이상 조선이 선진문화를 가진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은 1727년 조선통신사가 숙박하던 건물에 한어사라는 3년제 한국어 학교를 개설하였다. 조선 선비들은 한글을 소홀히 하였으나 대마도 사람들은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대마도에서 한국어를 잘하면 출세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1868년 명치유신 이후 조선 침략을 위해 이즈하라 어학소를 개교하여 한국어 통역사를 양성하였다고 한다. 

가네이시 성터는 현재 오테제2성과 제3성이 연결되는 입구에 설치한 문만 복원되었고 성의 정원이 남아있다. 가네이시성은 16세기 이후 소 가문이 거주하였던 성으로 1669년까지 지어진 저택으로 개천을 따라 석벽으로 축조되었다. 누문에서 서쪽으로 가면 가네이시성 정원이 있고 덕혜옹주의 방문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옹주는 대마도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와 1931년 정략적 결혼을 한 비운의 주인공이자 역사의 희생양이었다. 니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은 니카라이 토스이의 생가터이다. 그는 아버지의 근무지인 부산의 왜관에서 지내다가 귀국 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하였다. 1882년 특파원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며 춘향전을 일어로 번역하여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기자이자 소설가였다. 한국과 일본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도 했다.

 반쇼인은 역대 쓰시마 도주들의 묘소이다. 주변에 수령 몇백 년짜리 굵은 삼나무도 많고 인조가 하사한 법구인 세 발 향로, 에도시대의 쇼군 가문이었던 도쿠가와 가문의 위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저녁은 한인 식당에서 삽겹살을 먹었다. 역시 한식이다. 우리는 삽겹살, 꼬치, 소시지 등을 구워서 저녁을 먹고 근처의 마트와 약국에서 약간의 먹거리를 산 후 숙소로 걸어서 돌아왔다. 저녁 시간에 일행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국의 밤은 깊어 갔다. 아침에 숙소 옆 페밀리 마트에 가서 따뜻한 카페라떼를 마셨다. 아침 식사 후 일행은 만제키바시에 내려서 운하 위의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인공 운하인데 바닷물의 색깔이 진초록으로 깊어 보였다. 대륙침략을 위해 준비한 만제키세토! 이웃 나라를 점령하겠다는 그들의 야욕은 만제키세토의 물 색깔만큼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끝이 없는 침략야욕은 일본 열도의 침강으로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그들의 두려움일까!



  슈시강 단풍나무 길에서 히노키 나무와 단풍나무 마가목 느티나무 전나무 등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B 보도로 걸었다. 겨울이라 단풍은 볼 수 없었지만  풍성한 숲속에서 피톤치드 향 가득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징검다리도 건너고 비탈길도 오르며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지로의 연흔은 표면에 형성된 모양이 연꽃을 닮아서 생긴 이름이다. 신생대 이암이 퇴적되어 수류작용에 의해 빨래판처럼 울퉁불퉁하고 기하학적인 모양의 암반을 만들었다. 얕은 해저에 흐르던 잔물결과 바람 파도가 빚어낸 자연 예술이다. 토요포대는 1930년대 대한해협을 지나는 선박을 감시하기 위한 유적이 있다. 한국인이 징용으로 와서 5년에 걸쳐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폐함이 된 군함의 주포를 이 포대에 앉힌 것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거포이다. 종전 후 미군 폭파 반에 의해 해체되었다고 한다. 대마도에는 31개의 포대 터가 있다.

  히타카츠항으로 돌아와  다시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돌아오는 바다의 파도는 그 끝이 부드럽고 물결도 잔잔하였다. 쓰시마는 불모지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자원을 가진 섬이다. 리아스식 해안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섬이다. 임진왜란 출항지에서 조선통신사들의 행렬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는 섬, 한국과의 오랜 교류를 통해 애와 증을 함께 쌓아온 섬이다. 최익현 선생님이 잡혀 와 일본을 거부하며 순국한 곳이다. 징용으로 끌려와 포대를 설치하고 운하를 건설한 수많은 조선인이 있고 정략적으로 결혼을 해 이 쓰시마를 밟은 조선의 옹주도 있다. 다테이타 성의 홍매는 옹주의 끓어오르는 답답한 마음의 표현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한 내재적 투쟁을 해온 섬, 그 섬을 향한 연민은 나의 가슴에 남아있으리라. 그 섬은 이제 남의 나라가 되었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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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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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기 2024-04-05 20:07:44

    대마도는 거제에서 화창한 날씨면 볼 수 있을 정도로 지척에 있지만 일본 소유의 섬이란 것과 초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전부였는데 한국과 이렇게 많은 이야기로 담고 있는줄은 몰랐네요. 잘 읽었습니다.   삭제

    • 빽춘광 2024-04-02 14:56:17

      우리섬 독도도 일본놈들한테
      내줄라꼬 작정을 하는 놈들이
      판을 치는 이現世에
      대마도는 그냥 싸게 한번
      관광 다녀오는걸로 하입시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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