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디스 빅토리호 항해사 벌리 스미스 씨 거제 찾아 철수작전기념비 헌화
“귀하의 책임감 없었다면 오늘의 나 없었을 것” 
미 老항해사 “대통령님의 배려에 감사, 내 인생 가장 값진 일정” 
정원 47명 빅토리호 50년 12월 23일 군수물자 버린 뒤 정원 300배 ‘피란민 1만 4000여 명’ 태우고 3일간 거제행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편지 한 통이 67년여 전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된 미 해군 지휘 하에 있던 상선의 노 승무원을 감동시킨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1월 22일 청와대 문 대통령에게 미국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1.4후퇴로 인한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만 4000여명을 태우고 흥남항을 마지막으로 출항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자료사진
메러디스 빅토리호 항해사로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벌리 스미스(Burley Smith·89)씨가 보낸 것이다. 편지에는 “최근 문 대통령의 부모님이 1950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흥남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탑승했던 피난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4월 5∼6일 이틀간의 방한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이나 가족, 흥남철수작전 이야기를 아는 지인을 거제도에서 만나고 싶다”는 요지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월 20일 미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항해사였던 벌리 스미스씨에게 답신으로 보낸 편지 내용. 청와대 제공
문 대통령은 밤새워 답장을 작성했다. 문 대통령은 답신에서 “우선 펜으로나마 진심어린 감사와 환영의 마음을 전하며, 대통령의 일정상 직접 뵙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달라”며 “국가보훈처에서 스미스씨 일행을 맞이해 빅토리호의 흔적이 있는 곳을 안내하고, 따뜻한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동아시아지역 크루즈 여행을 준비 중이던 스미스씨는 편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2월 20일 문 대통령의 답장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여행을 함께 갈 아내와 딸 동료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대통령의 특별지시를 받은 국가보훈처도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보훈처는 유엔군 한국전쟁 참전용사 재방한사업에 준하는 수준으로 스미스씨 일행의 일정을 지원키로 했다. 보훈처는 빅토리호 관련 자료를 찾아내는 한편, 스미스씨가 편지에서 언급한 빅토리호의 항해기간(3일) 중 배 안에서 탄생한 아기 5명(당시 김치1∼김치5로 명명, 현재 67세)에 대해 관련기관을 통해 성명과 주거지 확인에 나섰다.

벌리 스미스(왼쪽)씨가 6일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도착, 버스에서 하차한 뒤 거제시장 권한대행으로부터 환영 꽃다발을 받고 있다. 거제시 제공
이미 잘 알려진  2명(김 1,5)에게 연락을 취하는 데 착수했다. 지난 6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실현됐다.

“항해사님 제가 ‘김치 원’입니다;뵙게 돼 반갑습니다.”
손양명씨는 스미스 씨를 만나려고 이날 새벽 5시30분 서울에서 KTX 고속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거제까지 내려왔다.당시 빅토리호 항해 도중 태어나 미군들이 ‘김치 원(1)’부터 ‘김치 파이브(5)’로 불렀던 5명 가운데 김치 원 손양영 씨(68)와 김치 파이브 이경필 씨(68)가 행사장을 찾았다. 손씨는 스미스 씨에게 안겼다. 스미스 씨는 “오, 당신이 가장 먼저 태어난 김치 원이군요. 건강해 보여 기쁩니다”라며 밝게 웃었다.

김치 5 이경필씨도 ‘웰컴’이라고 인사하며 스미스 씨 손을 꼭 잡았다. 스미스 씨는 “미국은 많은 피란민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고, 피란민들은 혼란 없이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믿음과 신뢰를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거제도 주민들이 추운 날씨 속에 음식과 옷이 부족했지만 북한 동포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다”고 기억했다.

벌리 스미스씨가 6일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 설치된 빅토리호 레오나드 라루 선장 등 이미 타계한 승무원들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있다. 거제시 제공
빅토리호 선상둥이 막내 ‘김치 5’ 이정필(67)씨도 ‘웰컴’을 연발하며 스미스 씨의 두 손을 잡았다. 이들은 이날 함께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기념비를 방문했다.

크루즈 여행 중인 스미스 씨는 전날 부산항에 도착, 부인과 딸, 여행 동료와 함께 기념비를 찾아 먼저 별세한 빅토리호 레오나드 라루 선장,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승무원 등을 위한 추도의식을 거행한 뒤 헌화했다. 흥남철수작전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함경남도 흥남에서 철수하던 국군과 미군이 약 10만명의 피란민을 경남 거제도로 이송한 작전을 가리킨다. 빅토리호는 흥남부두에서 12월 23일 출항한 마지막 배였다.

벌리 스미스씨 가족과 여행 동료, 국가보훈처, 거제시 관계자들이 6일 이미 타계한 빅토리호 승무원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한 뒤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거제시 제공
당시 빅토리호는 군수물자를 모두 버리고 피란민 1만4000여명을 태웠다. 그는 한미 양국 유대의 상징이라며 미국 국회의사당에 걸려 있던 성조기와 자신의 고향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시기(市旗)를 거제시민들에게 전달했다.

국가보훈처장은 미리 준비해간 대통령 기념시계를 선물로 전달했다. 스미스 씨는 “당시 미국은 가능한 많은 피난민을 데리고 내려오도록 노력했고, 피난민들은 아무런 혼란 없이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도록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현재 흥남철수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 승무원 중 생존자는 벌리 스미스씨를 포함하여 총 3명이다. 이중 1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루니씨는 지난해 6월 문 대통령 미국 방문 때 만남을 가졌었다.

1951년 1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 1만 4000여명이 승선, 갑판을 비롯한 선박 곳곳에 빼곡히 들어찬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빅토리호의 모습.월드피스 자유연합 제공

한편,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0년 겨울,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바탕으로 대반격을 개시헤 평양을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에 최일선 부대가 도달했다. 김일성은 강계로 수도를 옮겨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고,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상황에서 중공군 30만명이 기습적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이 뒤바뀌고 연합군은 후퇴를 하게 된다. 이것이 1951년의 1·4후퇴이다.

그 직전 함경도 지역의 국·유엔군은 흥남부두에 모여 해군의 도움을 받아 철수하는 것으로 결정하지만, 중공군은 이를 포착하고 흥남부두를 포위했다. 그러나 미 공군의 근접 폭격과 해군 전함들의 결사적인 화력 지원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도시 주변을 포위하는 데 그치고, 부두에 집결한 국·유엔군 10만명은 무사히 철수를 시작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국·유엔군을 따라온 수만 명의 피란민이 부두에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이들은 공산당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사람들로 다시 공산 치하에 들어갈 경우 모두 반역죄로 처형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이때 미 10군단 앨먼드 장군의 한국인 고문이자 군의관이었던 현봉학은 군단장을 강력히 설득했고, 군단장은 해군 함정 13척을 동원해서 9만명에 가까운 피난민을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철수가 끝난 뒤 마지막으로 부두에는 정원 47명에 불과한 미국 국적의 상선 겸 유조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만이 남았다. 현 고문은 또 선장이었던 레오나드 라루를 설득, 모든 화물을 버린 뒤 피란민을 태우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작은 규모의 상선에 피란민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올라타기 시작했고,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자신의 짐을 바다로 던지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 올려줬다. 이날이 1950년 12월 23일이었다.

1951년 1월 철수가 완료된 후 미군에 의해 폭파되는 흥남부두. 자료사진
정원 47명의 화물선에 올라탄 피란민의 수는 무려 1만 4000여명이었다.탈출 직후 미군은 흥남부두를 폭파했다. 빅토리호는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정원을 300배 넘게 초과한 위험하고 혹독한 상황이었지만 3일간의 항해기간 중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5명의 새생명이 탄생했다.

3일 후인 12월 25일 성탄절 저녁 무렵 배는 거제항에 도착했고, 피난민을 안전하게 내려준 후 빅토리호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해낸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당시 선장이었던 레오나드 라루는 1960년에 당시를 회고하며 “1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했던 경이로운 항해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신이 우리와 함께 한 기적이었다”는 말을 남겼다.보수집단으로부터 ‘친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문 대통령의 부모가 바로 이 배를 타고 67년여 전 극적으로 공산 치하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문 대통령은 2016년 12월 서울역 앞 연세빌딩에서 열린 현봉학 박사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 축사를 하면서 “현 박사님의 위대한 용기가 없었다면 저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적신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다시 (한국을) 찾으니 (흥남철수작전 당시가) 생각나고 보람도 느낍니다.”
백발의 퇴역 군인이 감회에 젖었다. 건장한 체구에 우렁찬 음성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를 잊게 했다. 6일 오전 10시 반 거제시 계룡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앞에 선 벌리 스미스 씨(89·예비역 대위).

그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사였다. 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부인 바버라 해커(73)와 딸 루스 클라크(62), 6·25전쟁 참전용사 가족인 티머시 라이언(70), 엘린 에이스 씨(71) 등 12명과 함께 왔다. 스미스 씨 일행은 중국, 제주, 부산, 일본을 거치는 크루즈 여행 중 흥남철수작전 참가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거제에 들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김광우 제대군인국장 등이 참석했고 박명균 거제시장 권한대행은 스미스 씨 일행을 안내했다. 행사에서는 미국 국가와 애국가 연주에 이어 스미스 씨와 김 국장 등이 차례로 기념비에 헌화했다. 스미스 씨는 김 국장에게 미국 국회의사당에 걸려 있던 성조기와 자신의 고향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시기(市旗)를 전달했다. 김 국장은 스미스 씨에게 문재인 대통령 기념시계를 선물했다.

그는 올 1월 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문 대통령은 2월 답장을 했다. 문 대통령은 “스미스 씨같이 사명감으로 충만한 선원들이 없었다면 나의 부모님이 거제도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빅토리호 승선원 가운데 생존자는 스미스 씨를 포함해 3명이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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