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칼럼 계룡수필
[계룡수필: 이양주] 장구가락 염불이양주-수필가/계룡수필회원/수필과비평작가회 회원/2014 젊은수필 선정/눌산문예교실 수료

경계를 만나면 따지고 드는 습성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사찰에 들어서는데 경건해야 할 경내가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장구소리로 들썩거린다. 속되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찌 내가 감히 승속을 가를 수 있겠나. 평소와 다른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그냥 장구소리가 아니라 가락 사이에 염불이 흘러나오고 있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염불 잘하기로 이름난 스님께서 목탁을 내려놓으시고 장구채를 잡으신 모양이다. 소리의 자유 자재함이 풍경 속에 녹아들어 주변을 채색하고 있다. 장구소리가 내 몸속에도 들어와 또 다른 장단을 흐르게 한다. 봄이 흐드러져서일까, 한참을 듣고 있자니 서늘한 목탁 염불보다 들뜬 장구가락 염불이 이 계절엔 제격이란 생각이 든다.

꽃 천지다. 만발한 꽃들의 눈부신 상찬이 사방에 차려져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제 속에 꽃을 품고 있다고 말하려는 듯 작은 풀꽃들조차도 꽃을 피웠다. 불어오는 바람에 단내가 묻어 있다. 따뜻한 봄 햇살이 뜰에 넘친다.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을 뵈어야 하는데, 오늘은 굳이 법당에 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안과 밖의 차이가 뭐 있겠나. 법석은 이미 바깥에 차려져 있는 게 아닐까. 이런 날엔 부처님도 봄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실 거다. 꽃과 나비와 나무와 새들에게도 설법하셔야지. 아니 오늘은 딱딱한 법문일랑은 내려놓으실 것 같다. 스님 한 분이 법당에서 나오신다. 사방에 봄기운이 가득한데 장구가락마저 흥을 돋우니 스님께서도 가부좌를 풀고 싶으셨을 게다. 걸음걸음에 장삼자락이 너풀거린다.
                     
   꽃이 피니 화산(花山)이요,
   잎이 푸르니 청산(靑山)이라.
   화장세계(華藏世界)가 바로 여길세.

합장하는 나에게 한 소절 툭 던져주고 지나가신다. 순간 봄이 내게 확 다가온다. 봄은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내게 왔는가. 나는 봄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고, 정작 봄이 왔을 때 봄을 놓쳐버렸던 게 아니었을까. 봄은 거듭 왔는데 나는 오늘에야 봄을 제대로 보는 것 같다.

걸음을 옮긴다. 이즈음엔 절에 오면 선사들의 돌무덤이 있는 부도 밭으로 향하곤 한다. 저 돌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견고함 속에 무엇을 담아 지키고 싶었을까. 영원히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말라고 돌 속에 새겨놓은 것은 무엇일까. 돌무덤 돌 뚜껑으로 닫아 놓았지만 눈 있는 자는 볼 것이고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인데, 나는 늘 침묵과 고요만을 더듬을 뿐이다. 오늘은 장구 염불이 예까지 따라 와 내 귀를 두드린다. 장구소리에 아득한 추억이 묻어온다.

어머니도 이렇게 꽃이 피는 화창한 봄이면 사람들과 함께 들놀이를 나가셨다. 다른 사람들은 장구를 다룰 줄 몰랐기에 흥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장구를 메셨다. 당신의 장구 솜씨는 전문가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선이 굵고 정확하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기량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중심을 잡기엔 충분하였다. 사람들은 어진 마음으로 그 장구가락에 맞추었다. 한량이라고 소문난 아버지는 큰 장단 사이사이에 화려하고 빠른 잔가락을 집어넣으며, 맺고 풀고 때론 자지러지듯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었다. 그가 소리가락이라도 뽑을라치면 사람들은 더욱 어깨춤을 덩실대며 추임새며 곡조를 뽑기도 하였다. 봄날의 열린 공간에서 사람들은 근심도 걱정도 미움도 원망도 다 내려놓고, 함께 어울려 신명을 풀어내었다. 어린 나는 나무 뒤에 숨어 그 광경을 구경했다.

평소에는 말수도 적고 웃음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는 어머니였다. 춤을 추는 당신의 표정은 마치 다른 세계에 가 계신 듯했다. 봄꽃과 어울려 나풀대는 한복치마는 또 한 송이 봄꽃이었다. 내가 무용학원을 다녀서인지 사람들이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어느새 흥에 겨워 어른들 틈에 끼어 춤을 추었다. 각자였지만 우리는 춤으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둥근 원을 만들고 한 사람씩 가운데로 들어가 춤을 추기도 하였는데, 그 사람을 빙 둘러싸고 기운을 모아 추는 춤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혼자 추는 춤은 깊고 아름답지만, 함께 추는 춤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몸으로 알았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늘 등 뒤가 서늘했는데, 오늘 내 등 뒤에 내리는 봄 햇볕이 너무나 따뜻하다. 끊이지 않는 장구소리가 시간을 이어준다. 한바탕 봄꿈이라도 꾸고 싶다. 부도에서 오도송(悟道頌)이라도 들려올 것 같다. 선사도 돌 속에서 걸어 나오시고, 나도 그리운 이들도 모두 함께 한 순간에 멋진 봄춤을 추고 싶다. 꽃은 피는가 하면 지기도 한다. 꽃이 지듯 나도 언젠가는 질 것인데, 또 어느 봄날을 기다려 춤출 것인가. 이 장단에 못 추면 어느 장단에 춤출거나. 구성진 장구염불 속에 경허선사의「입산가(入山歌)」가 흘러나온다.

    세상만사 모든 일을
    홀연히 생각하니
    한바탕 꿈이로다.                      
         (···)
    꽃 피고 새 우는 곳
    훨훨 뛰어다니면서
    나나리 나나리로
    태평가를 불러보세.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정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