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류동(紅流洞) 계곡

                                                         이 승 철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아늑하고 그리운 곳이다. 삶의 터전을 찾아 정든 산천을 뒤로하고 눈물을 뿌리고 떠나온 옛 살던 곳, 이제는 산천도 인적도 낫 설은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리움으로 가득 찬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붉은 노을 속으로 단풍이 곱게 물들면 문득 생각나는 홍류동 계곡의 그리운 추억이 홍엽의 정열로 되살아난다. 그곳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꽃바람만 불어와도 그리움에 도취되던 사춘기의 꿈 많던 시절이다. 그 꿈을 실현시키려는 과욕으로 인해 불어 닥친 시련의 폭풍이 절망과 비애로 세상을 포기 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길로 자성의 도를 닦는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은 곳이 가야산 해인사였다. 버스종점지에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 부락이라 했다. 상점 두 어집과 식당이 서너 집이 있었고, 초등학교가 있었다. 반도여관에 여정을 풀었다. 반도여관은 한식 기와집이 농촌의 사랑채처럼 지어져 있었다.
  스님이 되는 길은 생각처럼 쉽지 안했다. 그 뜻을 포기하고 산천의 정기를 받으면서 심신 수양을 하던 중, 청암 스님을 만나 관상사주학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이 훗날 인생진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 한철을 보내는 데는 가야산 계곡만큼 좋은 곳이 없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씨도 계곡과 숲속은 서늘하다. 산바람 물소리 청아한 가야산 계곡의 신록이 단풍으로 물들 때 청운 스님과 작별 하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홍류동 계곡에 갔다. 그곳은 신 부락 아래 십 여리길 계곡이다. 가야산 산록과 남산봉 사이로 흐르는 협곡이 구절양장처럼 이어져 있고. 그 주위는 아름드리 붉은 노송이 우거져 있었다. 기암괴석의 바위가 산 따라, 물 따라 온갖 형태로 깔려있고. 돌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정겨운 물소리,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바람소리, 이름 모를 산 새소리가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그 소리는 온갖 망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해탈의 소리로 마음을 백설처럼 맑게 한다. 심신수양지로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봄의 철쭉과 길 따라 줄지어 있는 벚꽃터널, 여름의 녹음방초,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은 사시사철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이런 경치는 해인사의 홍류동에서만 볼 수 있는 비경지다. 때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 그 느낌도 다르다. 산과 계곡, 하늘 까지도 온통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있는 곳이라 하여 홍류동천(紅流洞天)이라 한다.
  홍류동 계곡에서는 농산정(籠山亭)주위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옛 부터 시인묵객이 세파에 찌들린 몸과 마음을 씻기 위해 찾은 곳이다. 나도 그 경취에 도취되어 일 년간 산과 계곡을 뒤지면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사시사철 변화되는 산천에는 철따라 생기가 넘친다. 청아한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무아의 경지에 빠지곤 했다. 시름없이 앉아 있으면 온갖 번뇌 망상과 오탁 된 마음이 맑은 기운에 씻기어 나간다. 그 순간만은 몸과 마음이 날라 갈 듯이 상쾌하고 신선이 된 듯 환몽을 꾸게 한다. 
  삶에 쫒기어 각박하게 살 때는 문득문득 생각나는 홍류동 계곡이지만 만사 제쳐두고 찾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향생각을 하면, 꿈 많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마을보다 먼저 그곳이 떠오른다. 홍류동은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던 곳이다. 삶을 포기하였던 나약한 마음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고, 첫사랑 경아의 그리움이 남아 있는 곳이다. 진달래꽃처럼 피어나 단풍이 물들 때 떠나간 그녀와의 이별은 아직도 내 가슴엔 따사로운 입김이 꽃잎처럼 피어나 향기를 피운다. 연민의 정은 세월이 가면 잊어 질것만 같은데 그리움은 실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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