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칼럼 이승철 거제찬가
[이승철수필]④거제  조도 유교(鍮橋)(놋다리)마을이승철/시인 수필가 향토사연구가

④거제  조도 유교(鍮橋)(놋다리)마을
                           
   시인 수필가  이 승 철

사등면 가조도에 옛날에 노쇠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조선조 말기 까지도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노쇠로 다리를 만든 마을이라 하여 놋다리 마을이라 한다. 놋다리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 하면서, 놋쇠유(鍮) 다리교(橋 ) 유교(鍮橋)라 하였다. 놋다리마을은 가조도 옥녀봉이 여인처럼 다소곳이 앉아서 치마폭을 동남으로 펼쳐놓은 것 같다.

  옥녀봉 동쪽 산록에 자리 잡은 이 마을 북단 바닷가 물속에 천하명당이 있었다. 이곳에 묘를 쓰면 큰 부자가 되거나 큰 벼슬을 한다고 하는 물 명산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이곳에 묘를 쓰고자 했으나 물에 들어갈 잠수부도 없었고, 해녀도 없던 시절이라 묘를 쓸 수가 없었다.
  가조도에 천하에 제일가는 물 명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중국에 사는 이도백 이란 사람이 이곳을 찾아와서 자기 조상의 묘를 명산에 쓸려고 하였으나, 바다 속에 있는 명산에 내려갈 사람이 없었다. 여러 날을 수소문 하여 물속에 들어 갈 사람을 찾던 중, 젊은 총각이 찾아와서 물속에 들어가서 묘를 쓰겠다고 한다. 그 총각에게 이도백은 많은 돈을 주면서, 물밑에 가면 물소 같이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뿔 오른 쪽에는 우리 조상의 머리를 걸어 놓고, 왼쪽은 총각 아버지의 머리 유골을 걸어 놓고 나오라고 했다. 
 
 총각은 양손에 유골을 들고 물속으로 내려갔는데, 물속에는 큰 황소 같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눈에서는 시뻘건 불을 켜고 있고, 이빨이 긴 주둥이는 떡 벌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너무 급이 나서 뒤돌아서면서 유골을 바꾸어 걸고 올라 왔다. 물속을 바라보고 있던 이도백이 총각을 보고,“ 잘 걸어 놓고 왔느냐?” 하니까, 그 총각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큰 황소 같은 것이 입을 벌리고 잡아 먹을 여고 해서 뒤로 돌아 나오면서 해골을 바꿔 걸었다.”고 하니까, 이도백이 땅에 털 석 주저 안지면서 명당지는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탄식을 한다.

총각은 그길로 중국으로 가서 방황하면서 일거리를 찾던 중 황실 문지기를 만나서 황실 안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다가 천자의 눈에 띄어 천자의 딸과 결혼 하여 주나라 천자가 되었다. 이 사람이 주천자다. 주 천자는 신안 주씨 시조 주잠(朱潛)이다. 물에 들어가서 명산을 쓰고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고, 이름을 물에 잠길잠(潛)자를 쓰서 주잠이라 하였다. 주잠은 유학자 주희의 증손자다. 이도백은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마을에 정착 하여 살면서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되어 살 때 마을 중간으로 흐르는 하천에 놋쇠로 만든 다리를 놓았다. 그때부터 이 마을을 놋다리 마을이라 한다.
 
  마을 앞은 부산, 마산, 진해에서 통영, 남해, 여수를 통하는 뱃길이다. 바다건너 빤히 내다보이는 곳이 고현만과 사월포(沙月浦)다. 그 너머로 거제의 수봉인 계룡산이 동남에 우뚝 솟아 있고, 국사봉과 앵산이 옹위하고 있다. 앵산 자락은 왠 쪽 날개가 가덕도 앞까지 뻗어 있어서 북풍과 파도를 막아준다. 고현 만에 있는 세계굴지의 삼성조선소는 희망이 넘치는 빛으로 바라보인다. 놋다리 물 명산을 비롯하여 계룡산과 앵산에도 명산이 있다고 한다. 아직도 그곳 명산의 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삼한시대 중국의 사신이 서해를 거쳐 한려수도 뱃길을 지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이 바다를 강으로 표시할 정도로 해협의 물결이 잔잔하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햇빛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 양지다. 이 마을은 반농반어로 생활한다. 가조도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다. 1995년에 102가구에 331명이 밭 132ha, 논 30ha, 임야 15.9ha로 생활했다. 농경사회부터 내려오던 농사는 뒷전이고 요즘은 어업에 주력을 한다. 집집마다 어선을 자가용처럼 가지고 있다. 밭이 많기 때문에 무와 고구마를 많이 심는다. 고구마는 절간을 해서 농협에 수매를 한다. 예전에는 보리와 고구마를 주식으로 했다. 대동아 전쟁 후 3년 동안 가물어서 흉년이 들었다. 이때는 물이 없어서 밭곡식은 다 타버렸기 때문에 바다에서 나는 더벙(몰 종류)과 쑥, 칡, 송기를 벗겨 먹고살았다고 한다. 농사가 잘되면 일본에 공출을 바쳤다. 그 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민이 30여 가구가 이 마을에 와서 살기도 했다.
  
1970년 후반까지만 해도 가난한 어촌이었다. 그러던 마을이 앞 바다에 피조개 종묘를 하고부터는 잘사는 마을이 되었다. 2009년 가조대교가 놓이고 부터는 생활한경이 좋아져서 휴양지로 변모하고 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 앞은 2차선 포장도로가 놋다리 끝을 지나 계도를 돌아간다. 계도를 가는 오른쪽 바다는 진해만이다. 이 바다 가운데 광이 섬이 있다. 이 섬은 본래 이름은 괭이 섬 인데 한문으로 옮기면서 광이(廣耳)섬이라 했다. 마치 고양이의 귀와 같이 생긴 섬이다. 이 섬 앞에 함대처럼 생긴 취도(吹島)가 있다
  
선사시대부터 이 마을에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주위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한다. 세월 따라 물 따라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오고가고 하였지만 그 뿌리는 알 수 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마을의 동태부는 영양(潁陽) 천씨(千氏)고 다음이 김씨라 한다. 이 마을은 장수하는 마을이다. 지형적인 여건이 포구 같은 바다와 서늘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 풍요로운 해산물로 사람살기 좋은 별천지 같아서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 마을이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정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