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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산문16] '문학, 그 자유로움을 위해'재부거제향인(일운면출신)/해운대구중동행정복지센터근무/시인/수필가./소설가

 오전 일정을 마치고 일행의 동선을 벗어나 슬그머니 이탈하였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더위가 힘에 부쳤고 느리게 살아가는 이에게는 무리가 되는 듯하였다. 하여, 오후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산채 비빔밥 상차림에 곁들여 나온 걸쭉한 묵과 동동주에 이끌려 두어 순배 나눈 탓도 있었다. 변명을 더하자면 다음 일정인 쌍계사 탐방은 젊은 날 두어 번 찾아든 기억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 삼을 수 있었으리라. ‘나를 찾아 떠나는 문학여행’ 일원으로 문학관 탐방 중이다. 일행이 산행 길에 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섬진강으로 우당탕거리며 내달리는 하얀 계곡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터벅터벅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고맙게도 기사 양반은 작은 차를 구해 쌍계사로 오르자고 제의하였다. 고마운 마음만 받겠다며 거절하니 그늘에 돗자리를 마련해 주고는 편히 쉬라고 한다.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며칠째 장맛비가 내리든 중이라 계획되어 있던 여행이 취소되지는 않을까 자못 조바심이 일었다. 여덟 차례로 기획된 일정이지만 세 차례만 동행하였다. 시간이 허락지 않아 일행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기고 참여해 왔다. 오늘이 나에게는 마지막 일정이라 애틋함이 더하였다. 그리하여 하동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박경리 문학관’으로 향하는 마음은 소풍 가는 소년의 설렘이었다. 과연 난 문학인 박경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니 백지나 다름없다. 젊은 날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고, ‘토지’는 모두 읽어 내지도 못하고 소장하는 것으로 위안 삼으며 후일 시간 내어 찬찬히 읽으리라 계획하던 중 2008년 어린이날에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에 잠깐 떠올려 본 것이 마음 전부다. 컴퓨터를 켰다. 박경리란 작가를, 토지를 그리고 평사리를 검색하며 그분의 생애를, 문학을, 시대정신을, 역사를 다시 만났다. 그제야 고개 끄덕임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렇게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곤 늦게야 잠이 들었다. 잠깐이나마 그녀를 꿈에서 만난 듯하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귀를 세웠다. 집 앞 배롱나무에는 후두둑거림이 없다. 창가로 갔다. 붉은 기운이 감돌며 이내 순한 노랑이 번진다. 안도의 숨을 내 쉬고는 길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서재를 기웃거려 토지 1권을 가방에 넣었다. 예의를 갖추는 것이란 생각에서다. 집결지까지는 꽤 먼 거리라 이른 출발을 하였다. 주차장에 들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온갖 모양 구름이 수놓고 있었다. 한 일행이 도착해 버스가 있는 곳으로 이끈다. 종종거리며 걸어도 느리다. 이로 말미암아 지각을 하였다. 너무 여유를 부렸나 보다. 웃으며 반겨주는 착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너털웃음으로 마음을 숨겼다. 이제 떠난다. 문학 쉼터로, 지혜의 숲으로. 느리게 도심을 벗어난 노란 제트 비행기는 섬진강을 향해 달린다. 하얀 모래톱을 꿈꾸며……. 들녘을 가로지르고 몇 개 터널을 꿰뚫고 산자락을 돌고 돌아 2시간 30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하동 포구가 자리 잡은 섬진강 초입 송림이었다. 800년 전 숨결을 품고 나그네들을 맞아주었다. 한가롭고 공기가 참 순하고 맑아 좋았다. 자유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곳 하늘은 파랑과 하양이 더 짙다. 매양 좋다. 이제 목적지인 평사리로 향한다. 가는 내내 섬진강 물줄기는 역사의 질곡을 담고 유유히 역으로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바다

를 늘 가까이하며 즐기지만, 지금은 산이 좋고 들이 좋고 강이 좋다. 자연의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그 향기의 중심으로 가다 보니 악양 들녘이 펼쳐지고 소설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가 보인다. 악양 들녘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위로 오르니 소설 속 만석꾼 대지주 최치수가 거주했던, 등장인물들 삶 터였던 최 참판 댁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여행 목적지다. 소설 ‘토지’를 드라마로 제작하며 만든 세트장인 셈이다. 역사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토지’의 문학적 배경인 우리 근대사는 우리 역사이기에 그래서 소중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예컨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문학인이 그의 작품 속에 숨겨둔 시대정신이다.

일행은 최 참판 댁 아홉 공간을 둘러보고 나서 안내자인 정 선생 권유로 사랑채에 잇대어 자리한 누각에 모여 앉아 그 옛날 양반들이 누렸을 풍류와 권위를 느껴 보았다. 이곳에 서서 악양 들녘에서 일하는 식솔들을 굽어보며 가졌을 완고한 봉건적 권력이 느껴짐은 왜일까? 이런저런 상념이 이는데 정 선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듯 거침이 없다. 악양 들녘에서 땀 흘리는 식솔들을 내려다본 양반의 숨결이 다시금 거칠게 느껴졌다. 이곳에 오르기 전 행랑채 옆 작은 문에서 내려다 본 들녘 전경은 이곳 누각에서 더 아름다웠다. 들녘으로 일 나가기 위해 이곳을 나서던 당시 일꾼들 마음은 과연 가볍기만 했을까……. 땀이 식는다. 그들도 행복하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기념 촬영을 하고 최 참판 댁을 벗어나 평사리 제일 위쪽에 있는 박경리 문학관에 이르렀다. 또 다른 애틋함으로 다가왔다. 일상에서 벗어나, 한 시대를 외치다 홀연히 떠난 문인을 만나 옛 자취를 더듬어 봄은 분명히 휴식 시간이며 쉼표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인을 기리는 정도와 처지는 열악하다. 얼마 전 접하였던, 프랑스가 문인을 기리는 정도와 비교해 보면 아픔이 있음은 자명하다. 프랑스 행동주의 문학의 거장인 앙드레 말로가, 자국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 인물들이 영면하는 사당인 ‘팡테옹’으로 옮겨지고 대통령이 미사를 주도하여 전 국민이 애도와 진심 어린 존중을 표하는 것을 보고 난 후라 더욱 그러하리라. 우리 문학 최대 작품을 쓴 작가 박경리를 기리는 문학관은 그리하여 차라리 애 닮다. 문학 효용성이 널리 인식되고 독서가 활성화되는 것이 국민의식을 전환하게 하는 큰 요소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문다. 상상력의 뿌리는 책에 있다.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소설 ‘토지’의 근간인 평사리를 만난 것이 그래서 축복이다. 문득 ‘누군가가 날 사랑하게 하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서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은 구현된다.’라는 책 속 구절이 생각남은 왜일까? 그가 소설 ‘토지’를 통해 표현한, ‘비극적 현실을 이겨낸 생명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 역사와 그 모두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 그가 지녔던 민족의 한과 저항을 이곳에서 다시금 만난다. 악양의 넓은 들녘이 이야기 속에 필요하였고 이 들녘을 품어 안은 거대한 지리산이 작가에겐 필요조건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큰 한과 저항을 아우르기 위해서는.

하늘, 땅 그 사이의 공간….
강, 여름 그곳에서 삶을 사는 인간 그리고 그들에 의해 엮인 역사….
설움, 갈등, 증오 그리고 사랑, 화해, 평화와 공존….
평사리에, 우리 민족에 존재했던 근대사 모든 것은 소설 ‘토지’ 에서 문학의 자유로움으로 승화됐음이다. 가을 들녘을 떠올린다. 황금색으로 물결칠 내일을 그리고 평화를. 그때 다시 들러 덩실덩실 춤을 추리라. 세상을 산다는 것은 자세히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사랑이다. 나는 이곳을 자세히 관찰하며 사랑을 건졌다. 철없는 열매가 줄기와 뿌리의 고마움을 모르듯 강물 줄기가 근원을 모르듯 그러하므로 살아온 내가 이 문학 기행을 통해 나를 찾았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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