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 추억
                                                        심 인 자
                                                                                   

구석에서 할 일을 못하고 있는 하모니카를 찾았다. 언제 적이었던가. 이십년이 훨씬 넘었을 적에 것이었으니 제대로 불어질까 싶지 않다. 먼지가 앉아 윤기를 잃은 하모니카를 잘 닦아 내고 불어 본다. 그런데 고장 없이 그대로다. 음도 이상이 없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희미한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여고 2학년 봄이었던가. 총각 선생님 한 분이 우리 학교에 부임하셨다. 교장 선생님 소개에 이어 인사를 마치고 내려서는 선생님의 어깨는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은 국어 담당이셨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첫 시간을 얌전히 보낼 학생들이 아니었다. 몇 몇 짓궂은 남학생들이 떠들기 시작했고 여학생들도 딴 짓을 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선착순으로 집합할 것!"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신 후 교실을 나가셨다. 키들거리며 운동장에 모이니 십 여분이 지나 있었다. 화가 많이 나셨던 모양인지 운동장을 돌게 했다. 먼저 도착한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다시 돌아야 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웃고 떠들던 여학생들은 눈물을 질금거렸고 남학생들도 단단히 혼이 난 모양이었다.
   그 뒤로 우리들은 순한 양이 되었다. 긴장으로 수업에 임했다. 선생님도 더 이상은 화를 내거나 벌을 세우는 일을 하시지 않았다. 수업을 재미있게 이끄셔서 지루하지 않았다. 늘 자상하셨고 우리 편에 서 주셨다. 남학생의 축구에도 끼어 드셨고 여학생들의 얘기도 진지하게 들어주셔서 선생님을 좋아하며 따르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갔다.
   어느 날 선생님이 부르셨다. 며칠 전에 글짓기 과제물로 제출했던 원고를 들고 계셨다. 열심히 하라는 말씀에 가슴이 떨려 왔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에게 선생님의 격려는 힘이 되었다. 명작과 이해하기 힘든 철학, 종교 책까지 욕심을 부리며 읽어나갔고 틈이 나면 습작노트를 펼쳤다.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였다.
   내가 사는 곳은 여객선이 닿는 포구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이면 선착장에서 하모니카를 불곤 했다. 여느 때처럼 그날도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남학생과 낚시를 오셨다. 무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 내 손에서 하모니카를 가져가셨다. ‘섬 집 아기`를 얼마나 멋있게 부는지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그 뒤로 하모니카를 잡으면 습관적으로 섬 집 아기를 불었고 곧이어 선생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선생님은 해지는 풍경을 좋아 하셨다. 불붙듯 타오르는 노을이 바다마저 붉게 물들이며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아름다웠다. 수없이 보아온 일몰의 아름다움을 왜 여태껏 모르고 있었는지. 가끔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석양을 바라보는 선생님에게서 왠지 우울함이 묻어났다. 나에겐 그런 모습조차도 멋있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생겼다. 남학생이 낚은 물고기를 손질하여 매운탕을 끓이면 나는 양념과 김치를 갖다 드렸다. 그 시간은 나에게 기쁨이었다.
   부쩍 선생님은 배를 타고 고향집에 가셨다. 일요일 오후, 배가 닿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대문 안쪽에 서서 선생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이 점점 커져 가고 가을이 내게로 다가서던 어느 날, 선생님이 단상에 오르셨다. 병환 중이던 부친을 대신해서 사업을 이어가야 했기에 일년이 채 못 되는 교직 생활을 끝내고 학교를 떠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울해 하셨고 최근에는 자주 고향에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남긴 채 선생님은 떠나셨다. 가을은 쓸쓸했다. 교정의 느티나무가 옷을 벗고 초겨울을 준비할 때 나는 열병에 시달렸다. 가슴앓이는 쉽게 끝나지 않았고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선생님이 생각날 때면 하모니카를 꺼내 ‘섬 집 아기`를 불었다. 나의 눈길은 내내 선착장을 향했지만 어둠뿐 더 이상 선생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속내를 보이지 않은 나만의 사랑이었다.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진다. 낚시하시던 선생님 모습이 떠오르고 낙엽 지던 교정이 생각난다. 혼자 아파했던 겨울조차도 이제는 그리움으로 와 닿는다.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옛 추억들이 그대로 내 가슴에 담겨 있을 것 같다. 
   ‘선생님`하면 저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가끔은 안부를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명인사는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맡은 일에 충실하며 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기뻐하실 것이다. 많은 선생님을 만나고 인연을 맺는다. 부모님 다음으로 함께 하는 분이 선생님이지 싶다. 그런 만큼 꾸중도 듣고 벌도 받는다. 요즈음, 스승과 제자사이에 불협화음이 빈번해짐을 느낀다. 체벌로 인한 학부모와의 대립이 법정 시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니 걱정부터 앞선다. 믿음과 신뢰가 결여된 때문이 아닐까. 제자를 아껴 주고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서로가 가진다면 높은 벽은 무너지리라 생각한다.  
   며칠 전 어린이날에 딸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선물을 펼치며 자랑을 했다.
  "엄마, 작년보다 선물이 적어졌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선생님이 우리 반 모두에게 선물을 주셨거든요. 손수 만드셨대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난 이 선물을 내내 간직 할 거예요."
  나무 도장이었다. 오십 두 명이나 되는 제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새기면서, 항상 건강하고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셨을 것이다. 바쁘실 터인데 정말 고마웠다.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가끔 아이에게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며 선생님의 안부를 묻는다. 남자 선생님이라 겁부터 먹었는데 지금은 무척 좋으시다며 표정이 환하다. 다가오는 스승의 날에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릴 계획을 짜는 중이라며 즐거워한다.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으로 어긋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선생님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손때가 묻은 도장을 꺼낼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이 편으로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올려야겠다.   
   아이가 엉터리로 하모니카를 분다. 잘 불어지지 않자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 쉬운 것부터 배워주어야겠다. 섬 집 아기를 불면 나는 잠시 옛 추억을 돌아보는 여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 얘기를 들려 줄 까한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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