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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숙의 여행이야기-120] 6.25-70주년 잊혀진 유월의 산하를 찾아서‘동반령’ 포로수용소현장 무상의 세월속으로

한산면 추봉도 용공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돌아보다
"사상 검증에 아비규환"…지옥도라 불린 섬-'추봉도'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운 바다를 안고 있는 한산면 추봉도는 전쟁의 상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한 전원풍의 갯마을이다. 거제와 연관된 역사관광 상품 개발을 위해 찾아간 추봉도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쪽빛 바다를 갖고 있는 섬. 송림우거진 뒷산을 배경으로 청옥 빛 바다를 내려다보노라면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감회가 새롭다.
 
그 옛날 이종무 장군(세종대의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모아 출발했다는 이곳 추원만. 그래서인지 6.25때 인근 섬 용초도와 함께 악질 용공 포로들을 수용한 수용소로 또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섬이기도 하다. 둔덕 어구에서 카페리를 타고 한산면 면소재지가 있는 진두에서 새로 놓인 다리를 건너가면 통영시 한산면 추봉도의 추원마을에 도착한다. 추원마을은 추봉리 4개 마을에서 가장 큰 마을로 당촌, 중촌, 남촌의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추봉도 유적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조그만 안내 간판이 없다면 누구도 이 섬이 격랑을 견뎌낸 섬이었음을 알 수 없을 터. 몇 분 남지 않은 당시 주민들에 의하면 52년 5월 이 마을은 산중턱까지 전체가 포로수용소로 변했다고 증언했다. 지금도 수용소 현장이 있던 밭에는 주민들이 복구하면서 깨거나 치워버린 시멘트 블록 조각과 몽돌 등이 산능선과 밭 주변에 널부러져 있고 그 사이로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개망초꽃이 하얗게 피어 섬을 지키고 있다.

  또한 국군 경비대와 미군이 주둔했다는 수용소현장이었던 넓은 밭에는 섬 아낙들이 고구마를 심고 있었고 주변에는 유난히 많은 옥수수 밭이 눈에 띄어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예곡과 추원을 이어주는 동반령에는 국군 경비대와 미군이 게양했던 국기게양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몽돌을 깔아 만든 헬기장, S1에서 S4막사 돌담, 등이 세월 속에서 그 잔해만 드러내 놓고 있다.

 또 추봉 초등학교가 있는 예곡마을에는 미군보급창고와 식당, 포로수용소가 있었다고 전하고 마을 밭 언덕에는 아직도 비목처럼 보급창고 및 포로수요소 잔해가 남아 있다.예곡마을은 임진왜란전부터 인근 오아포에 경상 우수영이 설치되면서 당시의 관기를 주거시켜 장병들을 위안케 한 기생촌이라 하여 ‘여기골’ 또는 ‘여골’이라 부른 것이 이강조 한산면장 재임시 이곳을 예곡이라 칭하고 지명을 개명했다는 것이다.

당시 강제 철거된 주민들의 애환과 고통은 한산면지(별도소개)에 잘 나타나 있으며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옛 농토를 복구하기까지는 9년여의 세월이 흘러갔다고 한 주민이 이야기 했다. 그는 또 “전쟁 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정부에서 아주 작은 보상금이 지급되긴 했지만 그때 주민들이 입은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며 이는 “언젠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재삼 강조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는  6.25 70주년 특집 내용들을 내보내고 있어도 이곳 추원과 에곡마을이 있는 추봉도는 그저 한적한 갯마을로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순박한 섬사람들의 고향일 뿐이다.

 다시 6.25가 돌아오고 전쟁발발 7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섬사람들이 보여준 관심은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남아있는 수용소 잔해가 더 훼손되기 전에 유적지로 보존해 관광자원화 돼야 한다는 것이다. 분단의 벽이 허물어져 남북한 사이에 화해무드가 조성되나 싶었으나 요즘 북한의 행보는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한국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용초도, 추봉도 포로수용소는 문헌이나 기록상으로 찾아 볼 수 없는 처절했던 또 다른 이념의 전쟁터였다.

이번에 포로수용소와 연계한 거제의 테마관광 상품 개발 차원에서 둘러 본 한산면 추봉도와 용초도의 포로수용소 유적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함께 1박2일 여행 코스로 개발 인근 한산도 제승당과 더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코스로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구호와 총칼 앞에 죽어나갔던 주검이 몇 명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는 추원마을과 예곡마을의 수용소 현장은 70여년의 세월을 뒤로 한 채 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적어도 이 땅에 동족의 이름으로 피를 부르는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해 보면서 페리에 몸을 실었다.  
이금숙 <시인 /세계항공 월드투어 대표>

.<한산면지 관련자료 1 - 용초도 수색임무 띤 873부대>
1952년 5월경부터 1954년 말경까지 약 1만명의 포로를 수용했던 포로수용소 터가 이곳에 있다. 당시 미군공병대 1개중대, 수색 및 경비대 1개 대대, 경비임무를 띤 873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하며 6.25사변 포로중 가장 악질적인 공산포로들만 수용했다고 하는데 예곡․추원간의 중간 지점인 동반령에 지휘사령부가 설치되어 추원과 예곡 두 부락 자리에 수용한 포로들을 관리했다고 전한다. 수용소를 설치한 1952년 5월 전 부락민이 인근 창동, 곡룡포, 입정포, 진두 등지로 소개 당했다가 수용소 철수 후 재 입주했다. 군부대 정문의 기둥 등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수용소 규모와 그 때의 상황을 부락에서 작성한 자료에 의해 적어본다.

추원․예곡간의 중간지점인 동반령에 지휘사령부를 기준으로 북을 향하여 동편은 유엔군 막사(원형 콘크리트 약 20평짜리) 약 30동을 건립하여 헌병중대 및 경비대가 주둔하고 통신대, 인쇄소, 수송부대, 공병대 순으로 주둔하였으며 사령부 뒤편 동남쪽 하단 평지에 병원을 설치하는 등 예곡 목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병영 건물이 꽉 차 있었다.
    사령부 바로 앞 아래쪽 가에는 반원형의 석축을 쌓고 양편에 대형 좌대(座臺) 위에 사자상(獅子像)을 만들어 세우고 가운데에는 미국기와 유엔기를 게양하는 게양대를 설치하였으며(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음) 하단 옛 목치 위쪽에는 벽면 석조, 함석지붕으로 약 100평이나 되는 대형강당을 지어 주일예배를 비롯하여 영화관람, 위문공연, 연회장 등 다목적으로 사용하였다.

현 선착장 위치에는 LST를 비롯한 대형화물 수송선이 바로 인접하여 안쪽의 물양장에다 목재, 피복, 식량, 석탄, 유류 기타 군수물자를 하역 적재하다가 선착장 위쪽 동북 편을 정치하여 시멘트 바닥에 건평 약 500평 규모의 목조 함석으로 보급창고를 지어 각종 물자를 저장하였으며 해변 바로 위쪽에는 식수 저장장으로 사용하였다.

마을 해안선 위쪽부터 땅재 하단 농토 경계를 직선으로 옆으로 진주골 하단 옆 등으로 하여 하향 직선으로 북드럼치 상단 0.1㎞지점에서 다시 옆으로 남향 동시발점(同始發点)에 종착 연계하여 2차선 도로를 내고 도로 좌우에 높이 10m이상의 2중 철조망을 가설한 후 다시 내부를 8등분하여 또다시 노폭 3m 간격으로 3중 철조망을 치고 안쪽 통로에는 원형철창을 고착한 후 8군데에다 소집 단(약 400명)으로 분산 격리 수용하였다. 주 1회씩 수색작업을 할 때 바깥쪽 공간 통로에는 경비초병이 보초근무를 하였다.

수용소 밖 변두리에는 약 100m마다 기관포를 설치한 경비탑대를 설치하고 50m거리마다 기둥을 세워 대낮같이 밝은 외등을 가설하였으며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마을의 수용소를 포로수용소 제1관구라 불렀고 1관구로 출입하던 수용소 정문 석축문 한편이 남아 있었으며 그 외 차량정비대 및 세탁장 등이 있었던 흔적도 조금씩 남아있다.

조용하고 아담했던 갯마을이 하루아침에 어마어마한 별천지로 변한 이곳 포로수용소의 밤은 언제나 대낮같이 밝은 불야성을 이루었고 이글거리는 용광로처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폭풍전야의 공포가 감돌고 있었다.날이 밝아 아침이 되면 각 막사에서 자고 일어난 포로들의 우글거리는 모습은 개미떼 같았고 이따금 구호를 외쳐대는 함성, 목청껏  불러 제끼는 인민군가 소리는 으르렁거리는 맹수들의 울부짖음 같은 생지옥을 연상케 했다.
<관련자료 2- 한산면지 ‘용초도’포로수용소 현장 기록>
53년 3월 7일은 ‘피의 섬’
용초도는 섬전체가 포로수용소가 되었다.용초도 앞마을로 이주한 용초도 사람들은 포로들과 미군들의 공방전을 자주 보았다. “인민군들이 수용소 세 곳에서 동시에 자기들 만세를 부르고 군가를 부르면 미군이 쏜 불이 피웅하고 날아가. 그럼 조용한 기라. 포로들 시체는 섬덕고개에 즐비했어. 우리가 다시 이 마을로 이주 할때도 그 시체들을 보았는기라.”
일곱 살 때 강제 이주당한 이 곳 주민의 말이다. 용초도는 피의 섬이 되었다.53년 3월 7일  용초도 제12 포로수용소.수용소 당국은 명령과 규율을 지키지 않는 포로를 설득하려고 수용소장이 출두를 명령하자 2천 여명이 이를 거부하여 난동을 부렸다. 수용소 당국은 이를 최루탄으로 수습하려 했으나 어디에 숨겨뒀던지 각종 흉기와 돌멩이로 반격해와 부득이 경비대는 무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 23명이 사망하고 42명이 부상했다. (부산일보사. 앞의 책 P.429. 하루 전인 6일에는 추봉도에서 포로 85명이 피살되고 113명이 부상) 현재까지 이 섬의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용초도 산봉우리에 남아 있는 포로감옥과 물 저장소이다.
포로감옥은 약 80평 크기였다. 두께 30㎝ 높이 2.5m 의 돌벽으로 쌓여진 그 감옥은 8개의 방이 있었다. 돌벽에 군데군데 박힌 철근과 못이 수용자와 피수용자 간의 긴장과 갈등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이 미군들한테 저항한 포로들을 가둬놓은 곳이라고들 합니다. 벌준다고 밥도 안주고 굶겨 죽인 곳이라는 말도 있고 얼마나 튼튼히 지었는지 우리가 철근을 빼내서 돈벌이하려고 망치로 두들겨도 끄덕 안해요
. 인민군들이 죽어나간 곳이라는 소문이 있어 지금도 날이 어두워지면 어른들도 여기 혼자 오는 것을 무서워 할 정도이지요.”수용소 속의 감옥은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감시하는 미군과 국군, 쇠창살과 담벽에 갇힌 인민군글의 대치. 분단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담은 10평의 공간은 지금 소 마구간으로 이용되다 잡초 넝쿨과 나무들이 자라는 버려진 곳이 됐 있다.

감옥에서 10m 정도 위쪽으로 올라가면 70평 크기의 타원형 콘크리트 물저장소가 나온다. 깊이 5m의 이 물 저장소는 포로들의 식수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 마을 주민들은 감옥과 물 저장소를 포로들이 강제작업 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국군과 미군은 포로들이 작업을 할 때 포로 10명당 2명씩 달라붙어 총을 겨누고 감시했다고 한다.물저장소 콘크리트 벽 곳곳에는 숫자와 알파벳이 쓰여 있었다. COCO8479 등등의 숫자는 누가 무슨 뜻으로 써놓았을까. 이후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포로가 교환되자 용초리 사람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
추봉도 유적
용초도 포로수용소
용초도 포로수용소
용초도 포로수용소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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