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59]
      '등나무 꽃'  

    김   영  자  

 친정집 가는 길목
 날 반기는 등나무 꽃

 연두색 꽃술 가득
 애모가 뉘었는데

 그리움 남기고 가신
 울 아버지 닮은 꽃.

 얽히고 설킨 줄기
 오죽하면 갈등이랴

 꼬이고 얽힌 삶을
 용하게 풀어 가신

 딸내미 다독이던 말씀
 꽃이 되어 달렸네.

◎이름값이란 멍에
 세월에 끈이 달려 다잡는 것인지 벌써 앞산의 나뭇잎이 녹색으로 짙어졌다. 수상한 세월이라지만 마음을 기댈 곳이 있을 법도한데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것만 같아 자꾸만 뒤가 돌아다 보인다. 아마도 나이 탓이리라. 지난 9일 73년 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곁에서 그림자처럼 산 필립공이 향년 99세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영국 입헌 군주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실 문제에 있어 대중 앞에 특별히 나서지는 않았으나 영국인의 삶에 영감을 불어 넣어준 존재였다.
 
영국 여왕의 남편이라는 이름값, 그 멍에를 잘 썼기에 영국과 세계의 사랑을 받았지 싶다.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말할라치면 선비정신을 말하는 이가 많다. 선비 대접을 받는 집안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고자 애쓴 흔적들이 눈물겹다.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부귀영화를 등지고 밥을 굶으면서도 수염을 쓰다듬고, 초연한 삶을 산 선비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많지 않던가.조선시대 향약에 만좌명책(滿座名責)이란 형벌이 있었다.
향약은 지방수령이 정한 것으로 각 고을마다 백성들의 도덕적 해이와 전통문화 훼손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향약에는 규약을 어겼을 때 가하는 벌칙 등급이 정해져 있었고 형벌을 가하는 방법은 양반과 상민을 달리 했다. 예컨대 아버지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대들거나 상(喪)을 당한사람이 술에 취해 주정을 하면 아주 상벌(上罰)에 해당했다. 이때 신분이 상민이면 태(笞)를 치고 양반이면 많은 사람 앞에 자기 이름을 써들고 앉아 있게 했다. 이것이 만좌명책으로 이 명예형벌은 향약이 가할 수 있는 최고 형벌로 삼은 것이다.이름을 지키려고 목숨을 던진 사례도 드물지 않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
황천무일점(黃泉無一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선생의 임사부(臨死賦)이다. 그가 선비였기에 죽음에 임한 절망적 현실은 담담한 시정으로 읊을 수 있었으리라.임사부를 시조로 읊어 보았다.
     북소리 둥둥 울려 목숨을 재촉는다
     저무는 황천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 밤 그 뉘집에서 잠을 자고 갈 건가.

큰 짐승은 죽으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옳은 이름을 남겨야한다.인간학의 보고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은 나이 48세에 궁형(宮刑)을 당하였다. 궁형은 바로 남근을 거세당하는 남자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그 당시 궁형을 당하면 자살하는 것이 관례이었건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환관으로 일하면서 사기의 저술에 몰두하였던 절절한 통곡의 심정을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한나라 무제 때의 장군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 중엔 고통과 굴욕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은 이미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되었지만, 붓에 모든 힘을 기울여 자신들의 맺힌 한을 문자로 남긴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옛날 주나라 문왕은 은나라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으나 춘추(春秋)를 썼는가 하면, 굴원은 초나라에서 추방된 후에 이소경(離騷經)을 지었다. 또한 좌구명(左丘明)은 한쪽 눈이 실명되고 나서부터 국어(國語)를 저술했고, 손빈은 다리를 잘리고 병법(兵法)을 완성했으며,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되어 여람(呂覽)을 세상에 남길 수 있었다. 한비자는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의 글을 썼다.” 그런가 하면 그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우리 속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고 먹이를 구걸하게 되고, 무릇 영웅호걸들도 사직 당국에 잡혀 감옥에 갇히면 옥리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박고 간수나 잡역부에게 조차 겁에 질리게 되어 있다. 그런 때에 오히려 기개를 세울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사대부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사대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옳은 이름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구구절절 알려 주고 있다.

 조상의 이름을 지키고 또한 자기 이름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지조로 살다간 선조들의 삶이 물질이 풍요한 오늘날 우리들 삶보다도 질적으로 훨씬 높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름 더럽히는 것에 개의치 않고 치부에 올인 하는 현실이기는 하나 적어도 문인이라면 이름을 훼손하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손자 손녀에게 이름값 하는 할애비가 되고 싶건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에 자꾸만 뒤가 캥긴다.(이 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현대시조 발행인

시조작품 〈등나무 꽃〉은 김영자 시인의 작품으로 친정집 가는 길목에서 만난 등나무 꽃을 아버지와 연관 지어 담담히 그려낸 2수 연작의 서정시조다.

첫 수에선 친정집 가는 길목에서 만난 등나무 꽃에서 애틋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단다. / 친정집 가는 길목 날 반기는 등나무 꽃 / 이다. 해마다 4월 하순이면 피어나는 등나무 꽃 / 연두색 꽃술 가득 애모가 뉘었다. / 애모는 사랑하며 그리워함일 진데 / 그리움 남기고 가신 울 아버지 닮은 꽃 / 이란 표현이 독자에게 신선함을 안겨준다.

둘째 수에선 등나무 꽃과 아버지를 연관 지은 시작 태도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 얽히고 설킨 줄기 오죽하면 갈등이랴. / 그렇다 갈등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얽히고설켰다. 인생살이가 그렇지 않던가. 연줄 풀리듯 술술 잘 풀리면 오죽 좋을까만, 그래도 아버지는 / 꼬이고 얽힌 삶을 용하게 풀어 가셨다./ 따뜻하고 다감한 아버지의 / 딸내미 다독이던 말씀 꽃이 되어 달렸네./ 딸내미는 딸을 귀엽게 이르는 말인데 그 말씀이 꽃이 되어 달렸단다. 깔끔한 마무리가 읽는 이를 즐겁게 한다.

시인은 거제시조문학회 두 번째 시화집 『마음心자 닮은섬』 의 「아버지 특집」에서 사설시조로 〈아버지의 자전거〉라 題하여 “아버지의 자전거는 커다란 바퀴였다. (중략) 어린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가 그리운 날이면 페달을 열심히 밟는다. 어느새 아버지의 큰 바퀴를 닮은 내 자전거다. 구르는 자전거 바퀴 감겨오는 그리움.”이라 읊었었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오롯이 담겨 있기에 작품이 성공적이다.

칡넝쿨(葛)은 다년생 콩과 넝쿨식물인데 풀처럼 생겼지만 줄기가 해마다 굵어져 나무로 분류되고 있다. 거제 해금강은 칡이 많아 갈도(葛島)라 불렀다.등나무(藤)도 콩과 넝쿨식물 나무이다. 지팡이나 의자를 만들며 꽃은 말려 신혼금침에 넣어 주기도 한다.넝쿨식물은 혼자 서지 못하고 남을 의지해야 하는데 빙글 빙글 돌면서 올라간다. 이 두 넝쿨식물은 다른 습성을 지녔다.  칡넝쿨은 반드시 우측으로, 등나무는 반드시 좌측으로 돌면서 올라간다. 성질이 다른 두 식물들이 만나게 되면 서로 잘났다고 우기며 싸우게 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갈등이다.
 
‘갈등(葛藤)’이란 말의 어원은 불교 경전인 ‘출요경(出曜經)’에서 처음 쓰였다고 한다. 상대에 대한 애욕이 집착으로 되어 결국은 상대를 파멸로 이끈다는 내용을 ‘갈등’으로 표현한 거라고 한다.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인 갈등은 예를 들면 노사 간, 고부 간, 세대 간 등이 있으나 고부간의 갈등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갈등의 대표적이라 하겠다.
 
시조작품 <등나무 꽃> 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딸내미의 그리움을 접하고선 딸 없는 필자는 어떤 낭패감을 느꼈다. / 딸내미 다독이던 말씀 꽃이 되어 달렸네 / 란 표현에서 다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이런 작품을 읽는 시간은 늘 행복하다.  <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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