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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말수단편소설③] '엄마의 서리별'<2>신말수:김만중문학상,부천민족상,복사골문학상 등을 수상한 지세포출신 여류소설가/해성고졸업

“자 떠납니다. 인영씨의 묵은 세월을 걷어내기 위해서…….”
한참 안내서까지 뒤지며 장착법을 익힌 남편이 시동을 걸며 뱉어낸 말이었다. 무슨 앙금이랄 거까지. 혼잣말처럼 뇌까렸지만 엄마의 한숨소리로 남아있는 어린 날 내 기억은 그렇도록 이모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가야하나, 슬쩍 모른 채 넘기나, 밤새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먼 길을 결정하고 말았다. 엄마의 수(壽)까지 누린 이모의 긴 삶의 종지부를 확인하고 싶은, 어쩌면 고약한 내 심보가 우세한 탓일 것이다. 오랜 동안 가슴에 담아 묵혀두었던 옛일이 이모의 죽음 앞에서 약속이나 한 듯 머릴 쳐들고 일어났다. 고속도로에 차를 얹은 남편은 그냥 앞만 보며 쭉쭉 달렸다. 내비게이션 속의 초록 길은 길게 드러눕는가 싶다간 몸을 유연하게 움츠려 한참을 침묵하기도 했다. 전방 몇 미터 앞에 속도위반카메라가 있다는 예보로 가끔 내 상념을 깨뜨릴 뿐. 의자를 젖히고 비스듬히 누웠다. 카오디오에서 어느 테너 가수의 노래가 애잔하게 흘렀다. 
‘버드나무 아래서’
예이츠가 정리한 아일랜드의 민요를 노래한, 얼마 전 떠들썩하게 세상을 떠난 어느 테너 가수의 달콤한 목소리였다. 샛비재를 딛고 아침 해가 일어서던 여름날 아침, 그날도 엄마의 정지간엔 뽀얀 먼지를 품어 안은 햇살이 길게 들어 누웠다. 오가리솥에 웁쌀을 얹어 밥을 안쳐놓고 엄마는 잔솔가지 밑에 성냥불을 쓱, 그었다. 나뭇가지로 옮아간 불씨는 금방 환한 불꽃을 지어 올렸다. 불길 속을 토닥거리던 부지깽이를 들어 올려 엄마는 부유하는 먼지를 쫓고 있었다. 가난이 배어 있는, 그랬어도 구차한 기미를 허용하지 않는 엄마의 등은 너그럽고 늘 따뜻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막내 이모에게만 인색했다

그때 아침 댓바람부터 이모가 사립짝을 열고 들어섰다. 이모의 바구니에는 감자가 반 못되게 담겨 있었다. 
“감자 캤는데 씨알이 별로네.”
“별로인 씨알, 그중에 잔챙이들만 골라 오니라 애는 많이 썼다.”
정지간 앞에 풀어 놓는 이모의 감자 바구니를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던 엄마는 가시 박힌 말 한마디를 던져 놓았다,
“또 봐라 성아는 우찌 그리 날 몬잡아 먹어서 안달이고!”
“니 잡아 묵어 갖고 뭔 살 찔끼라고…….”
“금방 뭐라캤는데?”
“니는 국산말도 몬알아 듣나? 니 잡아먹어 갖고 뭔 살 찔긴냐고 했다.”
“나는 얼라들 쪄 주라고 종종걸음으로 달려 왔거마는.”
퇴박을 맞은 이모는 툭 튀어나온 입을 거두어들이지도 못하고 걸음을 돌렸다.
“도둑년, 어짜몬 저리도 정물이 될까, 줄라카몬 좀 올바른 거나 갖고 오지. 꼭 지 쪼다리 맹크로 새알꼽재기만큼 들고 와서는 어데다가 낯을 낼라고 하노. 이까짓 감자 몬 먹어서 환장한 사람 있는 줄 아는 가베.”
그랬으면서도 엄마는 함지박에 감자를 쏟아 붓곤 짚수세미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섬에 도착한 건 한 시를 넘어서였다. 남편은 아예 점심을 먹고 문상을 하자 했다. 그게 덜 번거로울 것 같았다. 밥숟갈 드는 일이 좀 가탈진 남편에게 상갓집 음식은 늘 만만한 게 아니었다. 포로수용소 기념관 옆에 유명한 멍게 비빔밥을 염두에 두고 두리번거
리던 참이었다. 2층, 온갖 방송국 출연을 현수막에 담은 멍게 비빔밥집은 요란한 광고에 걸맞게 정갈하고 품위가 있었다. 마치 고명처럼 밥 위에 잘게 썬 멍게와 김, 참기름 몇 방울로 비빔밥은 맛깔스러웠다. 맑게 끓인 생선찌개며 밑반찬으로 나온 해산물들이 물컥 섬에 대한 추억을 데불고 들어왔다. 이런 것들만 먹으면서 유년을 보냈고, 몸을 키워 어른을 만들어 냈던, 식탁 위의 바다것들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들였다. 
“아무래도 산소에 들렸다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왜?”
“휩쓸리다보면 시간 빼기 어려울 것 같고 그러다 영천으로 바로 따라 올라갈지 모르니까.”
“허긴 그렇기도 하다.”
점심을 먹은 후, 새름묘지를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남편이 다시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며 물었다. 어디, 하면서.
“그냥 아는 길인데 뭐.”
“그래도 아닐 걸.”
“새름 709번지.”
“어, 번지까지?”
툭 튀어 나온 번지수에 내심 놀랐다. 우리 집,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 그 집의 번지를 여태껏 속에 지니고 있었던 내 기억에 감탄했다. 번지수 보지 않고도 잘도 던져주고 가던 우편물, 우리 마을 우체부였던 필네 아버지처럼 나는 유년의 그 집 번지를 기억의 보
따리에 깊이 갈무리 해두었던 모양이다. 차는 화살표가 지시하는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언제나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이 유별났다. 그런 남편의 비위를 맞추려
는 듯 내비게이션은 전혀 뜻밖의 새로운 길을 지시했다. 삼거리 길이었다.
“아 삼거리동네네.”
반듯한 콘크리트 건물 몇과 슈퍼라는 간판을 처마 밑에 달고 있는 기와집, 세 방향으로 아스팔트길을 터놓고 앉은 마을은 예전의 흔적을 남겨 두지 않았다. 그 ‘흔적 없음’에 잠깐 마음이 쓰라렸다. 내가 살던 시절의 삼거리 마을은 오지였다. 우선 마을로 향하는 길이 험했고 가호 수 또한 변변찮았다. 차창에서 그 마을을 보내버리고 난 후, 삼거리에 대한 기억이 내가 조작해낸 그림이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사실 한 번도 이 오지 
마을을 와 본 적이 없었다. 그랬으면서 왜 흔적이란 말을 함부로 
떠올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꾸 울면 공영등에 만식이에게 시집보낸다, 정말 울어댈래? 이번엔 진짜 삼거리 숯장사한테 보낸다.”
칭얼거리는 계집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이런 말로 얼려먹곤 했다. 공영등에 만식이는 평생 엄지머리총각이었던 우리 마을 바보 트레이드 마크였다. 만식이가 신작로 길바닥에서 지랄병을 한 판 벌리고 나면 마을엔 뭔가 우환이 일어나곤 했다. 누가 물에 빠져 죽는다던지, 버스에 치여 다친다던지……. 공영 마을, 등처럼 굽은 언덕길에 엿장수 엄마와 사는 만식이 동태로 마을 사람들은 심상찮은 하루를 점치곤 했다. 만식이가 먹혀들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내미던 히든카드, 숯장사. 
숯장사.
내밀한 내 가슴 어딘가에 비밀처럼 숨죽여 기생하는 삼거리 숯장사. 가끔은 명치끝에 걸려 헉헉거릴 때가 있는가 하면 헛거미가 잡힌 듯 눈앞이 뿌예지는 슬픔으로 다가올 적도 있었다. 삼거리에서 숲진 먼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장날이면 구운 숯을 지게에 짊어지고 나오곤 했다. 사람들은 그를 삼거리 통꾼이라 불렀다. 다래며, 으름, 머루를 가득 담아 내 책상 속에 미리 넣어 놓던 정수, 번듯한 이름을 두고 아이들은 그를 숯장사 아들이라 놀려먹었다. 비단 그렇게 부른건 아이들 뿐 아니었다. 죄인처럼 무릎을 꿇던 그 아이, 아니다 그땐 당당한 젊은이였다. 아버지도 숯장사를 앞세우며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며 고함을 쳤다. 통꾼 새끼인 주제에 언감생심, 감히 어디에다 맘을 걸쳐볼라고 그래……. 아버지의 그 말은 한 숫젊은이의 기를 꺾는데 충분했다. 축 늘어져 무거운 어깨를 추스를 염도 없이 대문 밖을 나서던 그, 그의 뒷모습은 가시처럼 지금도 내 목에 걸려 있다. 스산한 날, 창가에 앉은 내 무심한 눈길을 짓밟고 지나는 바람 속에 스며나던 통증.

그 아이가 아침마다 책상서랍에 넣어두던 산열매는 늘 푸르싱싱한 이슬이 젖어 있었다. 나는 왜 그의 왼심을 모른 척 했던가. 그와 한패가 되어 아버지에게 수제비태껸으로 덤벼들어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어쩌면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숯 검댕이 통꾼 아들을 부끄러워한 건지 모르겠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된건 신문의 요란한 기사였다. 괌 비행장의 사고, 연일 떠들어대던 신문은 사망자 명단에 그의 가족을 사진 한 장으로 올려놓았다. 딸과 아들, 그리고 아내, 그는 앞에 앉혀 둔 그의 가족들을 긴 팔로 쓸어안고 있었다. 행복했던 그의 시절이 그 사진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신문을 폐지 속에 섞을 수가 없
었다. 가위로 오려 낡은 책 속에다 넣어 두었다. 첫 월급으로 선물한다며 그가 보낸, 롱펠로우의 ‘에반제린’ 책갈피 속이었다. 

그의 집이 있었을 삼거리 길에서 남편은 기기가 지시하는 대로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삼거리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디쯤 그의 집이 있었을까, 고개를 돌려 금방 스친 마을을 더듬어 보았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월은 한량처럼 놀고먹으며 그냥 지나간 게 아니었다. 추억할 만한 흔적까지 싹쓸이로 훑고 달려간 것이었다. 
남편의 예상대로 길은 생각보다 상당히 단축되었다. 시청 소재지에서 연초, 옥포조선소, 장승포 등, 많은 곳을 끼고 도는 대신 삼거리 길은 우리를 단숨에 마을 어귀에다 부려 놓았다. 삼거리 길이 손을 놓아주는 지점에 바다가 나왔다. 멀리 산 두 개가 안풍하게 포개진, 그래서 차라리 호수를 닮아버린 바다, 그 바다는 내 유년을 너그럽게 보듬어 주었고 내 청소년기의 방황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그리고 내 삶을 지시해주기도 했던 바다였다. 그 잔잔한 바닷물 위에 맑은 초가을 햇살이 앉아 간지럼을 태우고 있었다.  차는 오른쪽 길을 택해 마을을 멀리에 두고 새름 묏등을 향했다. 내비게이션 코드를 빼버린 남편은 자신 있게 샌치골 언덕을 향했다. 감자 바구니를 놓고 돌아서던 그날이었다. 아침 설거지를 끝낸 후, 딱히 들일이 없는 날이면 빨랫대야를 이고 나온 여자들로 도랑가는 만원이었다. 숙희네 미루나무 울타리를 끼고 앉은 도랑물은 장마 끝 여름이면 그득한 물줄기로 사람 끊일 날이 없었다. 반반한 빨랫돌을 차지하고 앉은 아낙들은 빨래는 뒷전인 양, 온갖 입심거리를 풀어내었다. 큰골 순돌이가 서른 살 총각 딱지를 떼게 되었다는, 공영등에 만식이가 신작로 바닥에서 또 지랄병을 한판 벌렸다는 둥……. 손바닥만한 동네 안이니 빨래터에서 씨앗이 된 소문은 금방 말을 타고, 번갯불처럼 순식간에 날개를 달기 마련이었다. 늘어나는 말수더구로 빨래터의 엉덩이들은 천근만근 무게인 양 일어설 줄 몰랐다. 늦게 빨랫대야를 이고 나온 이모는 빈자리 기다리느라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었다. 본 듯 만 듯 모두 비켜줄 생각을 안 하는 빨래터에서 한참을 그러고 앉았던 이모는 신작로 가에 박힌 돌 하나를 빼내와 어렵사리 도랑가에 끼어들었다. 그게 엄마 옆이었다. 이모는 틈을 비집는 것이 그래도 엄마가 편안했던 모양이었다. 슬쩍 곁눈질로 묵인까지 한 것까진 좋았다. 이모의 방망이질이 엄마의 팔을 세게 치면서 사단이 나고 말았다. 팔을 부여잡은 엄마의 두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이 도둑년이 뭔 억하심정이 많아서 날 치노?”
엄마는 그냥 이모네 빨래 통을 죄다 집어 도랑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거센 도랑물에 이모네 빨랫감들이 휩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풍덩 물에 뛰어든 이모가 이것들을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추 다 집어내었다 싶을 때 돌변한 이모의 얼굴 표정에 더 놀란 건 엄마였다.<계속>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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