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83]심옥배-'낙엽차'

「금요거제시조選-83」

낙엽차

심 옥 배

어디서 온 것일까 서성이는 저 낙엽들
잎새의 그림자는 바람에 수런대고
고요한 가을의 정취 가슴 가득 밀려온다.

이처럼 맑게 개인 정경을 앞에 두고
차 한 잔 끓여내어 호사도 누려보자
감나무 생강나뭇잎 낙엽들도 고와라.

깊은 색 고요한 향 찻잔에 피오르고
여행을 떠나온 듯 설레는 마음으로
한 움큼 낙엽을 우린 한 잔 차를 마신다.

◎ 청맹과니
지지리 복 없는 물장수가 있었다. 평생 힘에 부치는 물지게로 물을 저 날랐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다. 홀아비인 그가 근근이 모은 돈으로 산 복권이 1등에 당첨되었다. 당첨금을 수령할 날을 기다리며 복권을 간수할 곳을 찾았으나 단칸방이라 마땅한 곳이 없었다. 소문은 났겠다, 불안한 나머지 물지게 끈에다 복권을 함께 꼬아 숨겨 놓았다.
당첨금을 수령할 전 날 밤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몇 잔의 술을 마신 그는 달빛을 밟고 강가로 갔다. 그리고 달빛을 안은 강물에다 평생을 함께 한 물지게를 집어 들고 힘껏 던졌다.
“가난은 이제 끝났다. 잘 가거라, 물지게야.”
다음날 아침 물지게를 찾다 깜짝 놀라 강가로 달려갔으나 보이는 건 유유히 흐르는 강물뿐이었다. 이삼일 죽은 듯이 누웠던 그는 다시 물지게를 만들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지지리 복 없는 물장수 생각이 자주 난다.약골인 내가 줄곧 힘에 부치는 일만 하고 있어 십 수 년 전부터 예서제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정도가 심하여 검사를 할라치면 결과마다 입원 치료를 권한다. 이를테면 총체적 부실인 셈이다. 전면 보수나 수리를 해야 할 판인데 그럴 수도 없어 임기응변으로 버티고 있다. 몇 개월 전부터 오른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점차 보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병원을 찾아 MRI를 찍어보니 퇴행성관절염이란다. 심한 통증은 한쪽 연골이 파열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 약물 치료로 추이를 지켜보다 수술 여부를 결정하자고 한다. 당장 수술은 겁이나 의사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쪼그려 앉는 것이 제일 안 좋은 자세라고 하는데, 수 십 년을 쪼그리고 앉아 작업을 해왔으니 퇴행성관절염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 싶었다. 오히려 이제 찾아온 것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아는 이에게 병 자랑을 하였더니 쇠무릎을 술에 담가 마시길 권했다. 쇠무릎은 본초명이 우슬(牛膝)로 관절통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 문단의 선배 한 분이 우슬주(牛膝酒)를 장복하신다기에 두말없이 따르기로 했다. 그런 후 생약에 관심이 많은 이와 식사 자리에서 쇠무릎 얘기를 하였더니 술에 담그는 것도 좋으나 닭발과 함께 고아서 마시기를 권하여 전문 고움집을 소개했다. 노루 뼈다귀를 넣으면 좋지만 구하기가 어렵단다. 문득 얼마 전에 작업장 뒤편 산골짜기에서 본 죽은 고라니 생각이 났다. 고라니 뼈는 어떤가 하였더니 고라니도 노루와 다를 없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죽은 고라니가 있던 곳으로 부리나케 갔더니 그 자리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아뿔싸! 한발 늦은 것이다. 명약을 앞에 두고도 몰라보았으니, 더구나 죽은 고라니를 보고 재수 없다고 외면까지 하였으니 무식을 탓할 수밖에.

     삼년을 우린다는 노루 잡은 막대긴데
     노루뼈 외면하는 치옹(痴翁)의 절뚝걸음
     터 잡은 퇴행성관절염 그도 따라 나선다.

     헛기침 몇 번으로 무식을 감춰본다
     통증의 걸음마다 회한은 되감기어
     상채긴 깊어만 가고 아려오는 무르팍.
              拙詩, ‘무지의 변’ 전문

사십 수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한국자생란보존회 회원으로 나름 맹활약하고 있었다. 같은 회원 중에 도남모방 회장이란 직함을 가진 박정욱이란 분이 계셨는데 나보다는 30년 연배셨다. 그때도 지금처럼 매년 3월에 ‘한국란명품전’이 열렸다. 전시품은 한국춘란이 주종이었다. 회원들은 일 년 동안 정성 들인 난들을 출품하였는데 박 회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박 회장의 출품작 중에는 중국춘란 장하소(張荷素)가 들어 있었다. 출품작 심사에서 중국춘란으로 밝혀지면 난력이 상당한 애란인으로서 체면 구기는 일이기에 넌지시 중국 춘란임을 알려 주었더니 고마워했다. 못된 난 상인이 장하소를 한국춘란이라 장난친 모양이었다. 이후 월례회나 모임 때면 동생처럼 살갑게 대해 주셨다.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누구 소개로 거제도에다 산을 수만 평 사두었다면서 지적도와 토지대장 등본을 보여주었다. 내가 거제 출신임을 알기에 고향 가는 길에 땅이 어쩐지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지목이 산이라도 지적도엔 평면으로 나와 있기에 현지에 가보지 않고는 산의 모양새를 알 길이 없다. 뒷날 고향길에 살펴보았더니 경사가 심한 야산이라 쓸모가 없어 보였다. 박 회장에게 본대로 얘기를 했더니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또 한참 뒤에 나를 부르더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애장란 한 분과 그 땅을 바꾸자고 했다. 그 애장란은 두어 해 전 명품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나는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난에 완전히 빠져있을 때라 난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때였다. 고현에서 동부를 가다 보면 오른쪽 야산을 뭉개어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땅이 바로 그 땅이다.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못 보는 눈, 또는 그런 사람을 일러 청맹과니라 한다. 청맹과니, 나 때문에 생겨난 말인지도 모를 일이다.(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시조작품 〈낙엽차〉는 심옥배 시인이 맑은 가을날 낙엽차를 마시면서 일어난 감흥을 3수 연작으로 읊은 서정시조다.다음은 시인의 ‘시작노트’다.

“가을은 조용히 귀 기울이게 하고 쉬엄쉬엄 걷게 합니다. 산속에서 다리쉼을 할 때마다 낙엽을 주워 그것을 끓여 차로 마시기도 합니다. 가을은 음미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낙엽차를 마시면 아릿함과 같은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게 풀립니다. 그러고 보니 낙엽 한 잎에는 우주를 품고 있습니다. 비, 햇빛, 바람까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처럼 순수한 자신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가을은 가만히 앉아 낙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회이고 사랑입니다. 선물 받은 기쁨이기도 합니다. 다시 여행을 떠나 볼까 합니다.”

〈낙엽차〉를 감상 하자니 문득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아래 구절이 떠오른다.
초료소어심림 불과일지(鷦鷯巢於深林不過一枝·굴뚝새의 깊은 숲 둥지도 하나의 가지면 충분하다
옛날 요임금이 허유라는 현자에게 천하를 주려고 했을 때 허유는 이 말을 인용하여 거절하였다. 자신의 지금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 자리를 사양한다는 뜻이다.

낙엽차 한 잔으로 누리는 호사, 선물 받은 기쁨이란다. 잎새의 그림자에 바람이 수런대고 있다. / 어디서 온 것일까 서성이는 저 낙엽들 / 조용히 귀 기울이면 / 고요한 가을의 정취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 그래서 시인은 가을을 두고 음미 하는 계절이라고 하였는가 보다./ 이처럼 맑게 개인 정경을 앞에 두고 / 불현듯 떠오르는 아릿함을 삭이면서 / 차 한 잔 끓여 내는 호사도 누려 보잔다. / 주위에 보이는 / 감나무 생강나뭇잎 낙엽들도 곱지 아니 한가 / 이쯤해서는 가을의 정취를 정갈하게 이끌어 내는 소박한 시심에 흥이 절로 인다. 찻잔에 피어오르는 깊은 색 고요한 향이다. / 여행을 떠나 온 듯 설레는 마음으로 / 곱게 물들은 낙엽들을 줍는다. 하여 / 한 움큼 낙엽을 우린 한 잔 차를 마신다. /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 속에 시가 가지런히 얹히는 그 속에 척박한 우리의 일그러진 일상을 한 잔 차로 정화시켜 주는 듯하다.나는 낙엽차를 마셔 본 적이 없다. 여행을 떠나온 듯 설레는 마음으로 낙엽차를 마셔 보았으면 싶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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