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 - 143」
   국화분재를 들고 

      김  용  호

   공들인 국화분재
   골라서 차에 싣고

   바닷가 글벗 집을
   재 넘어 당도하니

   아무도 없는 마당엔
   가을볕만 새초롬.

   해심당 현판 아래
   고즈넉한 풍경소리

   글벗이 없고 보니
   터엉빈 가슴인데

   국화를 댓돌에 놓은
   발걸음이 무겁다.

◎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 한 편
 옛날의 시조는 어느 특정 계층이나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만 즐기던 시가 형식이 아니었다. 위로는 왕후장상(王侯將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초부목동(樵夫牧童)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짓고 읊었던 전 민족의 노래였다. 따라서 전문적인 작가가 따로 없었다. 상하 귀천이나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누구나 그때그때의 우감(偶感)을 읊었고 그것이 꾸준히 보급 계승되어 민족 문학의 주류를 이루면서 현대에 이르렀다.

  구 동해고속도로 옥계 동해휴게소 입구에 시조비가 서 있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동창이 밝았느냐’가 새겨진 시조비로 1994년에 건립되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이 시조는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지저귄다. 소를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어났느냐. 고개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남구만 선생의 이 시조는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은 김천택(金天澤, 1680-사망 미상)이 영조 4년(1728년)에 편찬한 것으로 최초의 시조집이라 할 수 있다. 김천택은 호를 남파(南坡)라 하고 젊어서는 포교(捕校)라는 대수롭지 않은 직책을 띤 일도 있었으나 이른바 한량으로 세상을 살다 간 가객이자 시조 작가로 74수의 시조를 남겼다.
 
청구영언은 그때까지 개인의 문집에다 약간씩 기록되었을 뿐 대부분 구비(口碑)로 전해오던 시조들을 채집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니 그가 국문학 특히 시조 문학에 끼친 공적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남구만은 조선 중기에 인조 효종 현종 숙종 4대에 걸친 세월을 산 정계의 거물이었다. 이 시조 작품은 동해시 망상동 심곡 마을에서 지었다. 청구영언에 단 한 편 전해지는 이 시조는 바로 망상동 유배 기간에 쓰인 것이다. 남구만이 망상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사색 당쟁이 격론을 벌일 때인 1689년 4월 역적 홍치상을 옹호했다는 죄명으로 유배되어 1년여를 머물다 갔다. 이때가 그의 나이 61세 때였다. 우리가 지금도 애송하는 이 시조는 유배된 이듬해인 1690년 봄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 진다.
 
 약천은 망상의 경치에 매료되어 풍광을 즐기며 유배의 울분을 삭이고 당쟁으로 지친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는 계기로 삼는다. 더군다나 그가 유배된 망상에는 자신의 호와 같은 약천(藥泉)이란 샘이 있어 더욱 정겹고 친근감이 갔다.  지금도 약천마을에는 그때의 샘 3개가 남아있어 이곳 주민들의 소중한 생활용수 노릇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모르긴 해도 약천은 차 끓일 물을 길으려 이곳을 오가다 마주친 동네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리라. 망상동 심곡 마을에는 시조에 등장하는 ‘재 넘어’와 ‘사래 긴 밭’이 실제로 소재한다. 현지 주민들은 약천이 살던 심곡 마을에서 오른쪽 야산을 타고 넘어가는 고개를 ‘발락재’라고 부르고 이 재를 넘으면 사래 긴 밭인 ‘장전(長田)’이 나타난다. 
 
 약천은 유배 생활의 갑갑함과 외로움을 달래려 인근을 오가며 자연을 음유했을 것이고 이때의 감정을 재 넘어 사래 긴 밭으로 노래한 것이다. 약천 샘에서 산 쪽으로 약 50m 올라가면 약천사(藥泉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약천사는 심곡 마을에서 1년여 머물다 한양으로 돌아간 남구만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에 반한 마을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영정을 모시던 곳이었다. 약천 선생의 영정을 모신 마을이라 이곳을 ‘영당(影堂)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심곡 마을에는 98년 그의 호를 딴 약천정(藥泉亭)이 들어서서 오가는 사람에게 이곳이 남구만이 머물던 곳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또 약천을 흠모해 세운 약천사도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망상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망상동은 자연환경이 수려한 전원마을이다. 동해시는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남구만 선생이 남긴 시조 문학을 계승해 지역 문화자원으로 발전시키고 망상을 문화적 향취가 느껴지는 명소로 추진 중이라고 한다.‘동창이 밝았느냐’, 시조 한 편의 역사적 의미, 시조인으로서 어찌 뿌듯함을 느끼지 않으리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시조 작품 〈국화 분재를 들고〉는 애배한 국화분재를 골라 차에 싣고 글벗집을 찾은 허전한 심사를 2수 연작으로 읊은 김용호 시인의 작품이다. 감상에 앞서 시인의 ‘시작 노트’를 옮겨 본다.

“코스모스는 꽃이 지고 까만 씨를 달고 있는 늦가을, 내가 기른 국화분재 한 점을 들고 재 너머 글벗 집을 찾았다. 벗은 없고 가을볕만 마당에 가득한데, 집 지키는 개조차 손님을 못 본채하고, 당호인 ‘해심당’ 이 새겨진 현판이 빛나는데. 가을바람에 처마 풍경소리만 고즈넉이 울리고 있었다.”

 설중방우(雪中訪友)라는 고사가 있다. ‘눈 속에서 벗을 찾다.’라는 말은 왕휘지와 대규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서예로 이름을 날렸던 왕휘지(王徽之)는 중국 동진때의 서예가로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저 유명한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이다. 왕휘지는 평소에도 자연을 벗 삼아 지내다가 나중에는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산음(山陰)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눈 덮인 겨울밤, 푸른 달빛 휘장을 드리운 정취에 취해 뜰을 거닐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외다가 갑자기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대규는 동진의 문인 화가로 금을 잘 연주했으며 박학다식 했는데 한사코 출사하지 않은 인물로 멀리 섬현(剡縣)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왕휘지는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저어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친구를 부르지 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아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친구를 꼭 만나야만 하겠는가.”  왕휘지는 승흥이래(乘興而來) 흥진이반(興盡而返)이란 명언을 남겼다. 흥 이란 즐겁고 좋아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런 고로 흥은 합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득실이 아니다. 문득 일어나는 순수한 감정이 소중할 따름이다. 왕휘지의 격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운치와 여유가 참 부럽다. 이런 정신세계를 어찌 동경하지 않으리오.

시조 작품 <국화 분재를 들고>를 감상하다 설중방우의 고사가 떠올라 적어 보았다. 국화 분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인다. 시인은 국화 분재의 고수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거제 섬꽃 축제’에서 좋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완성된 작품들을 지인들께 선물하고 있다.
 애배한 국화 분재를 차에 싣고 바닷가 글 벗 집을 재 넘어 당도 했다. 벗을 비롯한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빈집 마당에 가을볕만 새초롬하단다. 가을볕을 두고 새초롬하다는 표현이 시적인 정감이 넘친다. 그도 그럴 것이 ’새초롬‘은 꽤 얌전하고 쌀쌀하며 시치미를 떼는 듯하다고 사전엔 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글 벗 집의 당호가 ‘해심당’이었다. 그 현판 아래에서 풍경소리가 고즈넉했다. 고즈넉은 한적하고 아늑함일지니 글 벗 없는 터엉빈 가슴에 들리는 풍경소리가 고즈넉할 수밖에. 국화 분재를 댓돌에 놓은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단다. 그렇긴 하나 재를 넘을 즈음엔 국화 분재를 받고 기뻐할 글 벗 생각에 오히려 가벼워질지니, 시인에게 雪中訪友의 고사를 살펴보기 권한다. 
 뒷날 해심당에서 듣는 풍경소리는 한결 정겹고 운치 있으리라 짐작한다. 대설 절기 이름값 하는지 바람이 차갑다. 아!, 孟冬, 벌써 어깨가 움츠리어 반쪽이 되었다.능곡 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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