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산책(283)

     가을

    민병재

힘껏 민다고 해서
더 빨리 가진 않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여름은
돌아선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서늘한 바람을 남기며
어느새 저만치 가고 있네

짙어가는 나뭇잎 위에
내려앉은 새벽이슬
코끝이 차다
또 한번의 격정은 식어가고
잔잔한 강 위에는 나룻배 한 척

나뭇잎은 떨어지고
체념 스민 눈가에 물기가 어리면
아아
가을은 발자욱 소리도 없이
내 가슴을 딛고
이미 와 있네

(감상) 

눌산 윤일광 시인

죽정(竹亭) 민병재 시인은 자신의 이름 옆에 자신의 시관(詩觀)을 요약한 ‘초이상외 득기환중(超以象外 得其環中)’이라는 글귀를 적어 놓고 있다.
이 말은 당나라 말기 문인 사공도(司空圖)가 시의 미학을 24종으로 정리한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에 나온다. ‘드러나 있는 형상을 초월하여 그 세계의 중심을 얻는다’는 뜻이다. 심오한 진리가 숨겨져 있는 시작(詩作)의 원칙이다. 형상 밖에서 형상을 찾는다는 말은 현대 시의 기본이론인 상상력이 아니고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세계다. 

이는 곧, 낯설기의 세계이며, 자유로움의 세계이다. 그러기는 시는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이어야 하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노닐게 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통일이라는 동양사상의 맥으로 연결된다.

시 <가을>은 마치 한 편의 한국화를 보는 느낌이다. 특히 감각적 이미지가 서로 물고 물린다. ‘여인의 치맛자락’이라는 색채가 있고, ‘짙은 나뭇잎’이 후각을 자극한다. ‘코끝이 차다’는 촉각이고, ‘강 위에는 나룻배 한 척’이라는 시각과 ‘발자욱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있다.

시의 화자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은 ‘가을은 발자욱 소리도 없이 /내 가슴을 딛고 /이미 와 있네’라는 구절이다. 죽정의 시관인 ‘초이상외’에 비추어 가을이 가슴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그리움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을은 오지만 누구에게나 그 느낌은 다르다. 격정은 식어 이제는 잔잔한 강 위에는 나룻배 한 척처럼 고요해진 가슴에, 소리도 없이 찾아온 가을은 가을이 아니라 체념 스민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깊은 그리움일 게다.  (눌산 윤일광 문예창작교실 제공)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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