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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양득 황설수설22] ''군(軍)내 의문사

                                군(軍)내 의문사

1992년 3월 육사 졸업 후 광주 상무대에서 OBC(Officer Basic Course)라는 기본 장교교육을 마치고 떠난 소대장 근무지는 파주시 탄현면의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위치한 101여단 7중대 3소대였다. 당시 여단은 임진강의 휴전선 철책 경계를 주 임무로 위로는 1사단, 아래로는 9사단과 협조점을 이루고 있었다. 북으로는 전통의 사단이고 남으로는 노통의 사단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지금은 101여단이 없다. 1 소대장과 옆 중대 소대장이 공교롭게도 흔하지 않은 서울대 ROTC 출신이었다. 93년 당시 정 중위라는 육군본부에서 중위 보직을 담당하는 여군 장교는 필자에게 소대장으로 1년간 복무하고 다른 보직을 맡지 않으면 학군단으로 전출 명령을 내주겠다고 하였다. 운이 좋게도, 92년 9월부터 개장된 오두산 통일 전망대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교하소초”는 군사령관을 비롯한 VIP 방문이 많아 대대장이 늘 불안해하던 곳이었다. 당시, 가수 윤현숙의 아빠가 키 큰 윤용남 1군 사령관(육사 19기)이라는 다소 꼬인 소문이 군내에 돌곤 했다. 철책 근무와 후방 근무가 6개월 교대로 이루어져야 함에도 필자는 교하 소초의 소초장으로 9개월을 연속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소대원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본인은 내심 학군단으로 가겠다는 욕심에 불만이 없었다.

93년 초여름 토요일 오후에는 문민정부의 장관이 사전 연락도 없이 방문해서 야단법석을 떨기도 했다. 중대장과 대대장을 비롯한 여단 간부들도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필자만 10분가량 수행하였던 기억이 난다. 몇 달 후면 학군단으로 갈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1군단 전속부관을 뽑는다는 소식에 육사 48기 동기생들이 모처럼 군단 사령부에 모여서 반가운 재회를 하였다. 며칠 후 군단장 전속부관으로 사령부로 전입 신고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인사 명령을 받고 바로 다음 날 군단 인사참모를 찾아갔다. 대령 왈“1군단 내 육사 출신으로 전방 GP 근무 경험이 있고 키가 175 이상 되는 자원은 너밖에 없다. 그리고 군단장님과 같은 부산 출신이네.” 통상 전속부관이란 자그마한 키에 아담한 모습인데 군단장의 요구 사항을 들으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인사 참모에게 속알머리를 들이밀며 “대머리 전속부관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라며 읍소했다. 서울대 학군단으로 가게 되어있다는 첨언과 함께 극구 거부했다. 여단에서도 전속부관 이야기가 나와서 “별 셋도 안 하는데 별 하나 전속부관을 하겠습니까?”라는 반문으로 여단 인사참모의 부탁도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그 당시 3사 출신인 대대장의 도움과 비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군단 인사참모는 몇 달 후 인천지역의 모 학군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다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결국 선배 기수인 47기에서 다시 군단장 전속부관이 나왔다.

홀가분한 마음에 학군단으로 가기 전에 인근 육사 동기들을 주말에 찾아보곤 했다. 그중에 가까운 파주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하는 두 동기생의 목소리라도 들어 보려고 토요일 늦은 오후에 위병소에 도착하였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우리 군의 취약 시간대는 토요일 오후에서 저녁 시간이다. 졸업 후 20개월 만에 보는 반가운 만남이었던지 직접 위병소로 나와서 중대장과 대대장 모두 출타 중이라면서 필자를 데리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TV에서 보는 임시 건물이 있는 공동경비구역에서 북으로는 판문각이 있고 남측으로는 자유의 집이 있다. 자유의 집 옆에는 팔각정이 있는데 두 소대장의 호위를 받고 올라간 팔각정에서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파카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필자를 보자마자 전화기를 돌려대는 북한군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보였다. 긴장한 우리는 곧바로 내려와 장교 숙소로 향했다. 일반 남자 대학생 기숙사보다 조금 더 깨끗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어리둥절한 장면이 있었다. 책상 서랍 곳곳에 나뒹굴고 있는 권총 실탄이었다.

그러한 뜻밖의 경험을 하고 몇 년 후 필자는 97년 2월 말 5년 차 전역 후 미국에서 “김훈 중위 사망의 미스터리” 소식을 알게 되었다. 언론에 수차 보도가 되었고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로도 소개된 사건이다. 그 사건의 당사자는 육사 52기 졸업생으로 부친은 육사 21기로 94년 초 필자가 전속부관으로 내정된 그 1군단장이다. 미국에서 안타까운 김 중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더더욱 김척 장군의 가슴 아픈 슬픔과 절망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2001년 여름이었다. 미국 몬트레이에 있는 미 해군대학원에서 위탁교육을 받던 현역 동기생이 필자의 집을 방문 했다. 그 동기생은 생도 시절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아왔던 훌륭한 생도였고 군인이었다. 저녁 식사 후 궁금했던 김훈 중위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동기생은 총기 사망 사건 이후 중대장으로 판문점으로 부임을 했던 터라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군에서 조사한 자료와 증거를 아무리 설명해도 자식을 잃은 김척 장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필자는 사고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끼는 동기생의 입장을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들고 쉽지 않았다. 여담으로 JSA 영화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의 대본이 너무 황당하여 군에서 몇 번의 대본 수정을 요청한 결과 지금의 스토리보드로 영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공동경비구역의 남북한 경비병들이 서로 왕래와 우애를 나누었다는 줄거리 전개 과정을 군에서는 상상도 못 할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허무맹랑한 소설 같은 사건과 사고들이 군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서울대 학군단 근무 시절인 1994년에는 울분의 육사 출신과 학군 출신 소대장들이 무장 탈영했다. 일명 “장교 길들이기 하극상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몇 달 후에는 육사 출신 서울법대 위탁 장교가 경마 빚으로 총기 지참 은행 강도로 돌변한 사건도 있었다. 여든의 육사 출신 3성 장군도 육사 출신 자식의 의문사에 아직도 군과 힘겨운 싸움을 진행 중이다. 그 노병은 대를 이어 사랑하는 조국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자식까지 잃었지만, 군내 의문사나 자살 사건의 진상 규명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군과 육사를 누구보다도 사랑한 퇴역 백전노장의 발걸음이 여전히 무겁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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