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74」
    저구 수국길

      윤윤주

짙푸른 삶의 향연
카메레온 닮은 잎들

여우비 뜸한 틈에
송이송이 피웠구나

바닷가
저구 가는 길
따로 없는 연화경.

굽돌아 이어진 길
보라로 붉은 송이

신록을 등에 지고
모아이로 열반하여

포구의
방파제인 듯
장엄해라 저 위용.

 * 저구 :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
 * 모아이 : 칠레 이스터섬에 있는 석상

◎ 서불 전설과 사마천의 사기(史記)•4
 콜럼버스는 1472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했다. 콜럼버스보다 1700여 년 전에 대규모 선단을 거느리고 동아시아를 항해한 서복은 세계문화교류의 선구자였다. 특히 서복은 정복자가 아닌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전달한 우호적인 존재였기에 한•중•일 삼국에서 칭송받는 인물이 되었다.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국 단위의 서복연구회가 결성되어 서복의 항로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번 주에 보임안서(報任安書)를 마무리한다.
 예전에 부귀하면서도 이름이 소멸된 인물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지만, 뜻이 크고 기개있는 비상한 인물만이 칭송을 받습니다. 周文王은 구금된 뒤에 <周易>을 풀이하였고 孔子는 곤경에 빠지셨을 때 <春秋>를 지었습니다. 屈原은 쫓겨나서 <離騷>를 지었고 左丘明은 실명하고 나서 <國語>를 저술했으며 孫臏은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논했으며, 呂不韋는 촉으로 쫓겨 났지만 세상에 <呂覽>을 전했습니다. 韓非子는 秦나라 옥에 갇혀서 <說難>과 <孤憤>을 지었습니다. <詩經> 300편의 시들도 대체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속에 맺힌 바가 있었으나 그 道를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저술하며,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줄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좌구명과 같이 눈이 멀고 손빈과 같이 무릎뼈가 잘린 사람은 끝내 세상에 쓰이지 않자 물러나 서책과 책략을 논하여 울분을 토로하였고, 우회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생각했습니다. 

 저는 불손하게도 쓸 줄 모르는 문장에 자신을 칭탁하려고 세상에 잃어버린 옛이야기를 망라하여 행하여진 일을 대략 고증하고 시작과 결말을 종합하고 성공과 실패, 흥성과 쇠망의 이치를 살펴보고자 하여 위로는 軒轅에서 아래로는 지금까지 헤아려서 <표> 10편, <본기> 12편, <서> 8장,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을 지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一家의 학설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초고가 아직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런 재난을 당했는데 애석하게도 이 일을 다 완성하지 못했으므로 극형을 당했으나 성난 기색을 갖지 못했습니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여러 名山에 보관했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들에게 전해 고을과 도시에 알리고자 하며, 그렇게 되면 제가 이전의 受辱에 대한 질책을 보상받을 수 있을 터이니 비록 몇만 번 모욕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지만 俗人에게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죄를 지은 자는 처신하기가 쉽지 않고 하류층들은 비방의 말이 많은 법인데, 제가 말을 삼가지 못하여 이러한 화를 입고 거듭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어 선조를 욕되게 했으니 또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의 묘소를 다시 찾겠습니까. 비록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저의 수치만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이로 인해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창자가 뒤틀리고, 집에 있으면 망연자실하여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하여 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몸이 환관과 같이 되었으니 어찌 자신을 이끌고 巖穴에 깊이 숨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시 세상의 부침에 따르고 시대와 더불어 행동함으로써 미치고 미혹된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임안께서 저에게 현인을 추천해 달라는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는 저의 개인적인 속뜻과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비록 제가 아무런 유익함이 없고 사람들도 믿지 않을 터이니 오직 모욕을 받을 뿐입니다. 요컨대 죽은 연후에야 옳고 그름이 판명될 것입니다. 글로서는 뜻을 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저의 고루한 생각을 간략하게 말씀드립니다. 삼가 재배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사람은 헨델과 헨리, 루스벨트다. 연주를 듣다가 왕이 벌떡 일어났다는 그 유명한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은 건강이 나빠 치료에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남의 돈을 빌려 썼지만 건강도 못 찾고 돈도 갚지 못했다. 결국 반신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수감되었다. 그땐 불행했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이 감옥에서 불후의 음악인 ‘할렐루야’를 남겼다. 소설가 O. 헨리는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부정 대출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다. 거기에서 그는 무료함과 고독을 견디는 방편으로 글을 썼다. 그것이 저 유명한 ‘마지막 잎새’다. 미국에서 네 번이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은 루스벨트뿐이다. 그는 소아마비로 지체부자유였다. 하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 최강대국의 영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傷弓之鳥란 말이 있다.
 화살에 맞은 경험이 있어 활을 두려워하는 새라는 뜻으로, 어떤 일로 한 번 혼이 난 뒤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짐을 이르는 말이다. 하늘을 날다 시위 소리만 들어도 떨어지는 새처럼 빚이란 말만 들어도 질겁을 하는 세월을 살아왔다. 자그마치 30년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사마천의 <史記> 국역본을 여러 차례 읽었다. 후기에 해당하는 <報任安書>는 수십 차례나 읽었다.

   빈 술병 소리 없이
   쌓여가는 사금파리

   숙취가 꼬리 무는
   자다가 깨도 술병

   잊혀진 삶의 편린들이
   내게 묻는 삶의 얘기.

   아무리 털어봐야
   알곡 한 톨 있을 리 없는

   탈곡기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 온다

   이제사 멀쩡한 쭉정이
   네가 난 줄 알겠다.
           - 拙詩, ‘오늘•5’, 전문.

 지난 6월 27일 EBS/ 한국 기행 ‘거제가 좋아서’ 편에 <한국인이 만든 장가계>가 방영되었다. 장가계를 만든 한국인은 필자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제작한 ‘장가계’이련만 앞에서 말한 세 사람에 비하면 내 고통과 시련은 언감생심이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시조 작품 <저구 수국길>은 해마다 수국 축제가 열리는 저구리의 수국을 감상한 감흥을 2수 연작으로 읊은 윤윤주 시인의 작품이다. 윤길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거제시 남부면사무소 직원이었다. 오래전 그는 남부면의 도로변에 수국을 심었다. 그리곤 지극정성으로 이를 돌보았다. 세월 속에 어우러진 수국은 어느 사이에 명품이 되었고 저구는 수국의 명소가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윤길수라는 사람도 세상을 바꾸는 그 한 사람이었다. 어찌 자랑스럽지 않고 존경스럽지 않으리오.  시인은 거농 선생과 함께 수국 축제에 다녀온 모양이다.
‘시작노트’를 옮겨본다.

 “연로하신 거농 선생님께서는 손수 운전을 하지 않아 거주지인 부산에서 마을버스, 지하철, 시외버스, 시내버스를 타고 와선 거농 문화원에서 그림 나눔을 해 주신다. 춥고 더운 날이면 짜증이 날만도 하련만 언제나 한결같으시다.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회원들과 함께 수국 축제에 모셨다. 저구 가는 길 내내 모두의 가슴에 물이 들어 바다가 되었지 싶다. 연인과 가족의 여행이 아닌 단체 여행은 어렸을 때의 두레 모임 같아서 설레임의 연속이었다.”

 수국을 두고 케멜레온을 말하는 이도 있다. 꽃의 모양이나 화색의 변화 때문이리라. 올해 장마철 날씨는 유난히 변덕스럽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장대비를 몰고 다니고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나타나기에 올해 장마를 두고 ‘홍길동 장마’, ‘도깨비 장마’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시인은 / 여우비 뜸한 틈에 송이송이 피었구나 / 하고 감탄한다. / 바닷가 저구 가는 길은 따로 없는 연화경 / 이라고 감탄은 이어진다. 송이송이 핀 수국을 두고 사바세계에서 더럽히지 않고 깨끗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에 연화경이라 했지 싶다.

 저구 가는 길은 굽돌아 이어진다. 그 길가에 보라색인가 했더니 붉은빛이 감도는 수국꽃, 신록을 등에 지고 모아이로 열반하였단다. 모아이는 칠레 이스터섬에 있는 석상이다. 열반은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모아이와 열반, 그 이어짐이 절묘하다. 수국의 늘어선 모양세가 포구의 방파제인 듯 그 위용이 장엄하기 그지없다. 저구 수국길, 그곳은 한 사람이 일구고 바꾼 장엄한 세상이었다. 살맛 나는 세상이었다. -능곡 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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