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77」

   인상석 앞에서

김 현 길

   각황전
   신중도처럼
   운집한 삼천 아라한
   이곳이 피안이라
   두손 모아 합장한다
   부처님
   야단법석에
   헤던 숫자 까먹는다.

   해금강
   우제봉에
   서불과차 들어봤소
   진나라 방사 서불의
   동남동녀 그 삼천명
   어떤 게
   서불을 닮았는지
   자세히 살펴본다.

   육대륙
   다 모였네
   세계 인종 전시장이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사색하는 철학자며
   인생을
   논할 거면 우선
   이들 앞에 서 보소.

▲김현길 약력
     1956년 거제 둔덕 출생
     진주교대 대학원 졸
     2005년 시사문단 시 등단
     2013년 수필시대 수필 등단
     2014년 현대시조 시조 등단
     한국문협회원. 경남문협회원. 국제펜클럽회원. 
     거제시조문학회 직전회장 
     시집 : 「홍포예찬」 「두고 온 정원」 「나의 전생은 책사」
     시조집 : 「육순의 마마보이」
     수필집 : 「비에젖은 편지」
     장편소설 : 「임 그리워 우니다니」

 ◎바뀐 세상

한때는 많이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 있다. 바로 여권 신장(女權伸張)과 여성 권익 보호이다. 지금은 오히려 남권 신장이니 남성 권익 보호라는 말을 들먹일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해 상전창해(桑田滄海)를 들먹일 정도다.

지난날 여성은 억눌림 속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긴 한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조선조 헌종(憲宗)때 대학자 이규경(李圭景,1788.8.5. -1856.5.16.)이 우리나라, 중국, 일본은 물론 여러 나라 사물을 고증 해설해 놓은 19세기 최고의 백과사전이란 평을 듣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시장 여인들이 장시세를 휘어잡고 곡가의 오르내림을 맘대로 하였다. 사내들이 언사를 실수하면 여인네들이 떼지어 둘러서서 치고 받곤 하였다. 사내들 고개를 못 들고 굽신거리니 이 무슨 敗俗인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 장터에서는 생선이나 곡물을 팔고 사는 뚝심 센 여인들이 실수한 남자를 망신시키는 일이 간혹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다. 이렇게 당당한 여성분들이 처음 漢字 創造에 왜 참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漢字를 들여다보면 한자 사용권 내의 여성들의 숙명적인 비운 같은 것을 보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의 생각이란 기껏해서 시집갈 일에나 미친다고 <媤>한 것이나 같은 여자로 태어나 억눌려 살아도 <妾> 집이나 한 채 사 주면 된다는 <嫁> 뜻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예쁜 여자는 요정에 <婷> 있다는 말에 실감이 날 때는 남자로서 다소 미안한 감이 들기도 한다.

곡식이나 가꾸며 <委> 아이 낳아 기르는 <姙> 것이 맡은바 일이라 하여 스스로 집 안에 갇힌 <安> 여인은 편안하다 했으니 웃을 일이다.
 남자는 장가를 들면 일약 어른 행세를 했지만 여자는 시집가면 빗자루부터 들어야 했고 <婦>, 여자의 입은 비밀 누설하는 데에 다 같다 하여 <如>, 자기 가족이나 남편에게도 불신을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남이 경계해도 감내하였음을 기록은 전하고 있다. 
 궁예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 민생이 도탄 속에 허덕일 때 하루는 왕건의 부하들이 찾아왔다. 우리가 궁예를 제거할 테니 왕이 되기를 수락하라고 종용차 왔었는데 그때 왕건은 부인과 함께 있었다.

부인이 나가기를 기다리다 못한 부하 한 사람이 왕건에게 눈짓을 하고는 「부인 목이 몹시 마르니 정원에 가셔서 참외를 하나 따다 주십시요」하였다. 
아직 먹을 만큼 자란 참외가 없는 줄 아는 부인은 부엌문 밖에 붙어 서서 방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가 끝내 거절하는 왕건을 설득하기 위해 뛰어 들어갔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왕건은 하는 수 없이 수락을 결심하고 말았다고 한다. 내조의 처지에서 보면 장한 일이나 女權의 입장에서 보면 슬픈 일이다.
 
    말하기 좋다 하여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김천택의 청구영언 진본에 실려있는 고시조다. 이 시조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함부로 할 때의 폐해를 언급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말을 삼가고 대화 상대나 상황을 고려하여 필요한 말만 조심히 하는 ‘신중하게 말하기’의 담화 습관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한자를 들여다 보면서도 <娼> <姦> 는 언급치 않았다. 민망해서다. 
세상이 바뀐 오늘날,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한자의 배척 운동이 일어날 법도 한데 여성분들이 왜 가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곤한다.

몇 일 전 모 시의원의 부적절한 성희롱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것을 지켜 보면서 ‘신중하게 말하기’를 새삼 되뇌었다.
 死語가 된 女權伸張, 바뀐 세상을 실감하면서 말이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능곡 이성보 시인/게간현대시조발행인

《감상》

시조작품 <인상석 앞에서>는 사람의 형상하고 있는 3천명에 이르는 인상석 작품 앞에서의 감흥을 3수연작으로 읊은 김현길 시인의 작품이다.

각양각색(各樣各色)은 서로 다른 각각의 여러 모양과 빛깔을 말하며, 형형색색(形形色色)은 모양이나 빛깔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를, 천태만상(千態萬象)은 천가지 모습과 만가지 형상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모양이나 현상이 한결 같지 않고 각각 모습과 모양이 다름을 이르는 말이다.
각양각색이며 형형색색, 천태만상을 들먹인 것은 이 말들이
하나같이 ‘인상석’을 두고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각황전은 구례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1962년 국보 67호로 지정되었다.
각황전에 걸린 신중도처럼 3천 아라한이 운집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피안(彼岸)이란다. 피안은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선가 인상석을 보는 순간 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가 야단법석이 아니던가, 그래서 마음 다잡고 3천명의 인상석을 헤아리다 그만 숫자를 까먹은 모양이다.

거제 해금강 서쪽에 위치한 우제봉에 “徐巿過此”란 암각이 있었다. 서불이 불로초를 찾아 동도시 이곳을 지났다는 암각이다. 그때 동남동녀 3천명과 백 가지 기술을 지닌 장인 2천명, 도합 5천명의 선단이었으니 그 규모가 엄청나다. 3천의 인상석을 동남동녀를 재현한 것이란 제작 동기를 알고 있었기에 시인은 인솔단장격인 서불을 유심히 살핀 것 같다.

제작된 3천명의 인상석은 색상이 다양하여 마치 육 대륙의 사람들이 다 모인 세계 인종 전시장이란다.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표정이다. 각양각색에 형형색색에 천태만상이니/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사색하는 철학자며/ 저마다 사연을 지닌 얼굴들이다. 섣불리 어느 인생을 논하랴

말없는 청산이요 能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없는 명월이라
이중에 병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조선 중기의 학자 성혼(成渾)의 시조다. 푸른 산은 시비를 따지는 말을 하지 않고, 흐르는 물은 잘난척을 하지 않으니 청산과 유수만을 벗하고 살리란다.
인상석 앞에서의 시인의 마음 또한 성혼과 같을지니/ 인생을 논할거면 우선 이들 앞에 서 보소/라고 권한다.
병없이 분별없이 늙는다면 이에서 더 무엇을 바라랴.
                                       ―능곡 시조 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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