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거제시조選-193」
   의종에 대해 묻다 
(-92세 향토사학자 제익근)

      김 현 길
   찾아온
   후학 보더니
   뭐가 그리 알고 싶노 ....
   일태면 거림 토성은
   안 담부랑 택이고
   피왕성
   거서 복위할 날만
   기다림서 산기라.

   시종 무관
   홀박 데리고
   둔덕골이 꽉 찼제
   그래서 고려의
   임시 도성 생긴기라
   어느새
   나도 선생님처럼
   책을 베고 자고 있다.

◎淸福을 누린 八餘居士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는 24절기 중 스무 번째인 소설(小雪)이 지났다. 겨울나기가 벌써 걱정이다. 병약한 나는 그간 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 몇 차례의 수술과 시술로 가슴과 복부에 자국을 남겼는데 자그마치 열 군데다. 폐 조직 검사를 하느라고 가슴에 세 개, 요관 결석 시술을 받느라 복부에 세 개, 담낭 제거 수술을 받느라 네 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래서 생긴 별호가 십천거사(十穿居士)다.

 명나라 초기 묘현 스님은 보왕삼매론에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라고 일렀다. 그렇다. 만약 내 몸이 성하면 또 얼마나 교만하고 설치겠는가. 생각하면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는 말씀이 죽비처럼 느껴졌다.십천거사인지라 또 무슨 병마가 닥칠까 걱정이랬더니 지금까지의 병은 큰 병이 아니란다. 병 중에 가장 큰 병은 족함을 모르는 것이고. 이는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라 일렀다.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자호한 이가 있었다. 녹봉(祿俸)도 없는 그에게 어느 친구가 다소 생뚱맞은 호의 뜻을 물어왔다. 그의 대꾸는 이러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여덟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므로 팔여(八餘)라는 호를 지었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호시절에는 접해보지 못한 것들이다. 넉넉하게 즐긴다는 것들이 남과 다투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물건이나 생활은 아니다. 누가 탐하지도 않고, 아무리 즐겨도 막는 이가 없는 그야말로 하늘이 인간에게 무한정 제공하는 것들이다. 

 그는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다. 김정국은 이조정랑, 사간, 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중종 13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삭탈 관직되어 고양군(高陽郡) 서쪽 망동리(芒洞里)에 은휴정(恩休亭)이란 작은 정자를 짓고 약 20년간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 교육에 전심하였다. 정자 이름 은휴(恩休)는 임금님 덕택에 쉰다는 뜻이다. 불행조차도 다행으로 여기고 원망하기보다는 고마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는 비록 삭탈 관직되었지만 일상속에서 행복을 찾고 넉넉한 마음가짐으로 무욕과 여유를 지닌 군자였다. 김정국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아우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思齋集)>을 비롯하여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사재척언(思齋摭言)>, <경민편(警民編)> 등이 있다. <경민편>은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편찬하여 백성의 교육에 기여하였고, <촌가구급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서였으며 <성리대전절요>는 1993년 보물 제1157호로 지정되었다. 사재는 망동리에서 20여 년 동안 팔여를 실천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생업을 돌보지 않은 채 교육에만 전력했다. 1538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기까지 그의 청빈한 삶은 계속되었다. 이미 늙어 버린 사재에게 부자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 친구가 탐욕스럽게 재물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었다. 친구의 노탐(老貪)에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재물을 탐하는가”라며 이런 편지를 보냈다.

그대는 살림살이가 나보다 백 배나 넉넉한데 어째서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있기야 하지.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 청할 때 베개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 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라네. 이 열 가지 물건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네. 늙은 날을 보내는데 이외에 필요한 게 뭐가 있겠냐. 정치•문학•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긴 사재를 기리고자 고양시에서는 사재공원을 조성하고 사재정(思齋亭)을 건립했다.

   갈대발 걷어 올리면
   별은 총총 눈에 박히고

   사는 게 시들퍼도
   무서리는 또 쌓여가고

   녹차 속 건진 참별은
   연록의 옷 벗고 있다.
    拙詩, ‘난 있는 방’, 2/2.

 청복(淸福)이란 깨끗한 행복이니 재물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 욕망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다.난 있는 방에서 청복을 마음껏 누린 사재 선생을 기린다.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말이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시조시인 게건현대시조발행인

시조 작품 <의종에 대해 묻다>는 -92세 향토사학자 제익근이란 부제가 보여주듯 의종에 대해 소설을 쓰려고 동향의 향토 사학자를 찾은 지난 날을 회고하여 이를 2수 연작으로 읊은 김현길 시인의 작품이다. 장편역사소설 『 임 그리워 우니다니 』 는 거제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지은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 널리 알려진 정서(鄭敍)의 정과정곡(鄭瓜亭曲)과 고려 의종 이야기를 다룬 시인의 첫 장편소설이다. 시인은 이 소설의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정유년(丁酉年) 첫날, 거제 둔덕의 산방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며 누군가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합장하며 해에게 다짐했다. “그래, 내가 하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사람은 정녕 없다. 오늘부터 일단 노트에 점이라도 찍어 보자.” 나는 평소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시를 쓰는 것도 운명, 소설을 쓰는 것도 운명이라고.... 그렇게 다짐하여 상재된 『임 그리워 우니다니』는 「정과정곡」의 첫 구절을 현대적 어감으로 바꾼 것이니 소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아니하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이를 재조명해 본 창작물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체득한 거제의 모든 것을 작품 속에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하여 들인 공이 상당하였으리라.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의종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둔덕면 거림리가 고향인 향토사학자 제익근 선생을 백범춘씨와 찾아갔었다. 선생님은 거동은 불편했지만 정신은 초롱 같았다. 그 당시 연세가 92세 때였지 싶다. 일 년 뒤 소설 초고를 가지고 찾아가서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선생님이 주무시는 이부자리 옆에 수많은 서적들이 쌓여 있었다. 그 뒤 얼마 못 사시고 돌아가셨다.” 연로하신 향토 사학자께선 찾아온 동향의 후학을 보더니 자상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 뭐가 그리 알고 싶노... / 라 하신다. / 일태면 거림 토성은 안 담부랑 택이고 / 의종은 피왕성 거기에서 / 복위할 날만 기다림서 산기라 / 정서를 귀양보낸 의종(毅宗)이 정중부의 소위 ‘무신의난’을 피하여 도망쳐 온 뒤 3년간 재기의 희망을 품은 날들을 일러주고 있다. 향토사학자의 말씀은 이어지고 있다. / 시종 무관 홀박 데리고 둔덕골이 꽉 찼제 / 그래서 둔덕골에 / 고려 임시 토성 생긴기라! 그렇게 일러 주시던 제익근 선생. / 어느새 나도 선생님처럼 책을 베고 자고 있다. / 연로하신 향토사학자의 질박한 사투리로 2수 연작을 읊어낸 솜씨는 그 수준이 상당하다 하겠다.
 문득 누군가가 벽에 걸어 놓았다는 ‘가훈’이 생각난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오늘하고, 내가 오늘 하는 일은 제대로 한다.” 책을 베고 자고 있는 시인, 돈 되기는 틀린 사람이지 싶다. 그렇긴 하나 곧은 눈빛은 살아있기에 그 눈빛에 신뢰를 보낸다. ―능곡 시조 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