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장에 나서면
                                            윤      석      희

 홀연히 집을 나선다.  일상이 무미하고 권태로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서다. 시끌벅적, 웅성웅성, 구성진 소리. 장날 시골 버스 안은 참으로 정겹다.
   아제여, 어멈아. 할벤겨. 서로를 불러가며 안부도 주고받고, 행복도 나눠 갖는다. 허허로이 여며진 마음은 슬며시 사라지고 이내 가슴이 따스해진다. 뉘 집 아들 잔칫날 소문내고 소랑 마을 부음도 띄운다. 황포 댁 누렁이 풀려 소채밭 다 망쳤다 푸념도 풀고, 파인애플, 알로에 값 나아져 소주 댓 병 마실 만하다는 여유도 묻어난다. 간간이 바람난 며느리가 도망갔다는, 고도리 배 나간 아범이 주검이 되어 뭍에 올랐다는 얘기로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새 소식은 삶의 가녀린 떨림으로 마주쳐 온다.
   내 호칭은 돼지 농장  돼지 댁이다. 돼지 수발 아니 하고 장 마실 나간다고 아랫동네 영감님이 지청구한다.  코 범벅이 되어 어미 등에 업힌 아기가 칭얼대면 끈적한 손을 잡고 얼러줘야 하고 주위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웃는다. 장에 내다 팔 푸성귀 보퉁이를 이고 숨가쁘게 뛰어오는 양지 말 어멈을 불평 없이 기다려주고, 젊은 새댁은 차에서 내려 이를 받아 들고 헐떡이며 달려온다. 갓 잡아 올린 도다리가 퍼덕퍼덕 바닥으로 튀어나와 한바탕 소란이 일고 즉석에서 생선전을 벌려 비린내 나는 버스 안은 그야말로 난장이다.
   사일, 구일은 내가 사는 거제의 장날이다. 허 생원과 동이가 나귀를 끌고 장에 가던 예전같이 풍성하고 흥청이지는 않아도 옛 정취의 흔적은 남아 있다.
   매퀘한 고추 부대 앞을 지나면 아낙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옷 전이다. 즉석에서 입어보고 거울에 비치는 옷맵시에 여인들의 소망이 묻어난다. 실타래, 고무줄, 수세미 등을 파는 잡화 아저씨와 눈인사를 한다.  호미 낫 등의 연장을 늘어놓고 칼을 갈아주시는 할아버지 건강을 여쭈어 본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막내아들의 학자금 마련이 낫 가는 손에 힘을 실어준다. 대소쿠리며 키, 되, 죽부인 등을 펼쳐 놓으신 할머니의 갈라진 손도 잡아본다. 우시장 입구에 늘어서 새 주인 만나기를 기다리는 우공들의 눈망울이 서글프다.  새끼돼지, 강아지의 어미 찾는 애달픈 울음은 온 장을 적시 운다.  뻥튀기 차 앞에 늘어선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꿈을 꾼다. 만병통치약 효험을 호언장담하는 다리 저는 아주머니의 손뼉 치는 소리. 흥정하며 실랑이 벌이는 소리. 몽땅 떨이를 외치는 곰보 아저씨의 손 마이크 소리. 장 풍경은 언제 보아도 활기차다. 작은 전쟁터다. 휘적휘적 돌아다니다 빈손이 멋쩍어 면양말 몇 켤레 고르며 생동하는 열기에 스며든다. 쑥버무리 한 입 베어 물며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장마당의 정취를 가슴속에 담아본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정신을 놓아버린 아낙이 히득거리며 옆에 와 앉는다. 때 절은 베개를 앞가슴에 대고 젖먹이는 시늉을 한다.
   이 질척거리는 장마당은 그대로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가짜도 많고 속임수도 비일비재하다. 진솔한 땀이 배어나고, 피맺힌 한도 녹아난다. 어린애, 늙은이, 여인네, 남정네, 뭇 짐승들까지 하나로 어우러진다. 그 속에 행복이 있고 슬픔도 있다. 핏줄의 갈라짐, 이어짐도 보인다. 나태해지고 생기 잃은 생활에 싱그러운 활력을, 충만한 에너지를 충전시킨다. 장마당에 널려 있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꿈과 설움과 소망을 소롯이 주워 담으니 마음 또한 넉넉해진다.
   해질녘이면 파장이다. 보퉁이를 실은 장꾼들 차가 노을 속으로 하나 둘 사라진다. 휘장 하나 보이지 않는 장터엔 중생들이 떨구고 간 황량함만 남는다.  파장은 다하지 않고 막을 내린 연극 무대이다. 바로 삶이다. 실체는 보이지 않고 흔적은 남는다. 나날이 파장이 있어 개장도 한다. 이 공터 위에 농축된 생의 뿌리를 박고 웅성거리며 살아가는 모습도 아름답다. 오래지 않아 사이버 장에 밀려 이 난장도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퇴색해 가는 광장의 의미가 아쉽기만 하다.        .
   그 버스를 이웃들이 다시 타고 온다. 팔 것들을 다 팔아서 필요한 것 사고 읍내 소식까지 덤으로 챙겨서 한껏 흥조차 난다. 그사이 병원에 들려 물리치료를 받고 오는 할머니의 관절염이 안타깝다. 뽀글뽀글 퍼머한 머리가 쑥스러운 아낙의 엷은 미소가 깔린다. 사료 부대 옆에 풀 약 병, 소주 되 병, 토막 낸 동태 두어 마리가 나둥그러졌다. 손자 놈 성화 못 이겨 마련한 사탕봉지는 모처럼 할아버지 나들이에 사랑을 드러내며 주름진 손에 매달려 있다. 국밥 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 걸친 파장의 취기는 객기가 되어 농이 질박하고 걸죽하다. 기사 아저씨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도 흥겨워 아낙들의 어깨춤이 신명난 무당의 춤사위 같다.
    나를 내치지 않고 감싸 안아 주는 훈기에 취해 코를 벌름벌름 한껏 마신다. 시들어가던 내 영혼이 물기와 윤기를 얻어 한결 싱그럽다.
  “야, 야. 다리 쑤실 긴데 요기 쪼께 걸터 앉거래”. 재 너머 사는 할머니가 당신 무릎을 가리키고 있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