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서
                                                  우    광    미               

생각만 하고 미루던 곳에 왔다. 정들었던 곳도 이사한 후로는 다시 오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세탁소 간판은 여전하다. 하얀 바탕에 검정 색으로 쓴 그 간판은 복잡하던 머릿속을 단순화시키며 지난 시간들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아마 긴 장마가 끝난 날이었지 싶다. 이 동네로 이사 온 날이. 다급히 살 집이 필요했다. 입맛에 맞게 입지 조건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떨어져있던 우리가족은 다시 합치기로 결정했고 아이들의 새 학기가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 모퉁이에 난 광고를 보고 얻은 임대 아파트는 메인 도로에 있는 주택가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다. 낮엔 뒷산에서 가끔 꿩이나 청설모를 볼 수 있었고 밤이 되면 시골 같이 적막했었다. 유흥점도 없고 유명한 사립학교가 있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격차가 많았다. 계층 간의 분리가 확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네 사람들이 유일하게 모두 이용하는 세탁소가 있었다. 그곳에선 계급이나 계층 같은 건 없으며, 주인은 수선 분야에서 장인이라 소문이 나 있다는 걸 이웃의 귀띔으로 알게 되었다.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미루고 있던 바지 단 수선을 위해 말로만 듣던 세탁소를 급히 찾았다. 세탁소 안의 풍경은 여느 집과 다를 바 없다. 수북이 재인 옷들이 일감을 짐작케 했다. 한켠에는 실을 물고 있는 재봉틀이 손길에 닳아 반질거리며 지난 시간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때 심하게 뿜어져 나오던 다리미의 김이 가라앉자 벽면에 붙은 그림이 눈에 띄었다. 중앙에 선 아이의 키는 매우 컸고 양손을 잡고 있는 부모인 듯한 사람들의 키는 작았다. 맨 위에 쓰인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빠 엄마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림의 선은 굵고 힘이 있으며 밝은 색조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안정된 아이임을 느끼게 했다. 

  세탁소 풍경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동안 그는 내가 맡긴 바짓단을 뜯었다. 뜯고 보니 안팎은 달랐다. 바느질된 틈새로 삶의 보풀과 먼지가 들어앉아 있다. 그 위로 나의 모습이 교차된다. 습한 날들에 나의 다림질은 미숙했다. 펴지지 않는 주름을 펴기 위해 한계를 모르고 올리던 다리미의 온도에 번들거리는 자국을 남기기도 하고, 급기야 눌어붙어 되돌릴 수 없는 삶의 다림질도 있었다.

  그저 주름만 펴기 위해 급급했던 지난 시간이다. 깨끗하게 차려입은 옷에 작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붙으면 바로 떼어내었다. 단 속에 든 먼지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 속의 허물과 부족함을 이리도 몰랐단 말인가. 그는 솔기 속에 든 내 삶의 편린까지 털어내려는 듯 말끔히 솔로 빗어 내렸고, 능숙한 솜씨로 바느질을 끝낸 옷을 허공에 한번 털었다. 그 위로 엄청난 세기의 스팀을 내뿜는 다리미가 지나가자 처음처럼 바짓단이 잡혔다. 수선된 바지의 주름도 반듯하게 잡아 자존심까지 세워주었다.

  세탁소 주인은 세탁물로 옷 주인의 삶을 짐작한다. 찌든 때와 얼룩만 제거하는 게 아니다. 터져버린 솔기 사이로 흘러든 주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색하며 흉보거나 탓하는 예는 없다.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몇 번씩 박음질을 한다. 옷감의 본질을 알고 다가서는 그의 다리미 앞에선 이내 몸을 누이는 천들. 일상에서 구겨져 부끄러웠던 부분도 말끔히 펴진다. 

  새로 산 옷처럼 폼 나는 인생도 있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느 것도 비껴가지 못한다. 옷의 크기가 줄기도 하고 늘기도 하고 빛깔은 바래기도 한다. 누군가의 처진 어깨에 이른바 뽕을 포개 넣기도 하고 주름을 펴면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부부의 마음이 그 곳에 녹아 있는 듯하다. 수선된 바지를 건네받으며 아이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자 부부는 마주보고 웃는다. 그들의 장애를 닮지 않고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주는 것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라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가 수선의 장인으로 소문이 난 건 아마도 삶의 비밀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발에 밀려 한적하던 이곳도 신도시처럼 낯선 건물들이 들어섰다. 내 삶의 여정에서 유난히 힘든 일들이 많았던 곳. 전과 다름없이 세탁소가 문을 열고 있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축복은 낮은 곳에 산재하고 허리를 굽혀 줍고자 하는 사람의 몫인가 보다. 마음을 다스리며 걷던 그 산책길을 따라 걷고 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세탁소 지붕 위에서 더욱 반짝인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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