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 4월 강을 품다

 떠날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회귀본능일까. 고향을 떠난 지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나 이곳을 다시 찾았다.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작은 배 하나가 강 길을 열어, 내 젊은 날의 강과 만난다. 끊임없이 소리하는 바다와 달리 강은 소리 없이 흐른다. 그 강은 바다로 향한다. 낙동강의 하류는 바닷물과 뒤섞이는 기수역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 지난 날 강의 모습과는 관계없이 모든 것을 포용한다. 민물의 강이 성질이 다른 바닷물을 만나 서로를 내어주고 적응하며 변화하는 곳이다.

  강의 둔치는 자연습지의 야생 갈대밭으로 남았으면 좋았으련만, 지금은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인간과 더불어 공존하는 자연으로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낙동강 주변에 조성된 대저생태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봄 햇살에 노란 유채꽃이 손짓한다. 절로 피어나는 게 꽃이지만 이렇게 군락을 이루기까지 겨우내 새들의 잠식을 지켜낸 노력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햇살을 받으면 그야말로 샛노란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꽃길을 간다. 가족과 함께 혹은 다정한 연인들이 유채꽃처럼 화사하게 웃음을 머금고 앵글 앞에 선다. 이 공원에서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꽃이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난다.

  드넓은 유채밭 뒤로 보이는 육교에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간간이 지나는 경전철이 이들의 사랑을 실어가는 듯하다. 유채꽃 너머 건너편 회색빛 아파트들도 노란 반사광에 희망이 가득한 동화 속 마을 같이 보인다. 그들을 뒤로하고 강의 하류 쪽으로 향한다.

  낙동강 하구언이 있는 을숙도에 가을이 깊어 가면 갈대는 황금빛으로 자라 사람 키를 훌쩍 넘는다. 교통수단으로는 하루에 몇 차례 드나드는 작은 배가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누구나 한 번 쯤은 마지막 배를 놓치고 애틋한 사람과 하룻밤의 로맨스를 상상하곤 했었다. 한 때 낭만을 내걸고 장사를 하던 추억의 선술집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인생과 문학을 나누던 곳. 저기 어디쯤인가 술 익는 냄새가 난다. 한여름 밤 모기를 쫒기 위한 쑥 연기는 우리를 삶의 불확실 속으로 더욱 다가가게 했다.

  이곳은 청춘영화 촬영지로, 스케치 장소로 각광받던 곳이다. 하구언 철새 보호구역 안의 에코센터에 올라가면 창을 통해 갈대 숲속의 철새들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창이 아무리 넓고 투명하다 해도 벽이 될 때가 있나 보다. 갑자기 그들의 삶터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생각에 발걸음을 옮긴다.

  밖으로 나와 눈길을 잡는 철새들의 고혹적인 안무를 바라본다. 지난 시간과 오버랩 되는 기억들에 눈을 감는다. 눈이 감각을 다 열었다면 귀는 열린 감각에 상상을 더하는 가능성이다. 비로소 들린다. 분주한 소리가 그제야 들린다. 해질녘 습지에 사는 작은 생명들이 하루를 거두는 소리가.

  사는 일도 그랬을 게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들 속에 진실들이 있었을 거다. 내 삶도 기억의 습지 속에서 끄집어 올린 진실의 소산물이 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내게 들려준다. 강 주변 습지는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깃들어 사는 삶의 보고이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행여 내 발걸음에 채일까 조심스레 발길을 내딛는다. 

  역류하지 아니하고 화합하며 순리대로 흐르는 지혜를 강은 일찌감치 내게 가르쳐 주었다. 강을 따라 이곳저곳을 걸으니 옛 기억이 아른거린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하루의 끝자락이 강물에 노을을 내리고 붉은빛이 낭자하다. ‘푸드득’ 갈대 숲 사이로 소리가 들린다. 저녁이 깃들자 새들이 둥지를 찾아 돌아온 모양이다. 어디선가 낡은 배의 모터 소리가 들린다. 내 그리운 사람이 그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환영에 뒤돌아본다. 동화 같은 초승달이 핼쑥한 얼굴로 서쪽 하늘에 걸려 있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