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산책 (333)
       그루터기

        고동주 

한때 청설모가 오르내리고
예쁜 새가 내려앉아
휘파람 불던 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지금의 모습

겁 없이 달려드는 병마와
전쟁놀이 끝내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즈음
기억에라도 남아 있을까

솔숲 휘파람 소리에
미소 짓던 한때가

감상)

눌산 윤일광 시인,거제문화원장

‘그루터기’는 풀이나 나무, 곡식 따위를 베어 내고 남은 밑동을 말한다. 그루터기가 독자의 심금을 울린 소재로 쓰인 것이 미국의 아동문학가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1964년에 쓴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다.

<어느 곳에 나무와 친구인 소년이 있었다. 나무와 소년은 언제나 나뭇가지로 그네를 타고 사과도 따먹고 즐겁게 함께 놀았다. 소년은 자라자 돈이 필요할 때는 사과를 가져갔고, 어른이 된 소년이 결혼하고 집이 필요할 때는 나무를 베어가 집을 지었다. 여행이 가고 싶다고 했을 때는 몸통을 잘라 배가 되어 주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소년은 이제는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나무에게 피곤해서 쉴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무는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밑동밖에 없으니 와서 그루터기에 앉으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루터기에 앉았다. 나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했다.>

일반적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존재를 부모에 비유한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개는 ‘에로스 에피투미아, 아가페’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에로스(Eros)적 사랑’은 육체적 사랑, ‘에피투미아(Epithumia)적 사랑’은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사랑, ‘아가페(Agape)적 사랑’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한다.

고동주 시인의 <그루터기>의 중심행간은 ‘겁 없이 달려드는 병마와 전쟁놀이 끝내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즈음’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여러 가지 중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첫째는 그 사람이 꼭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그루터기>라는 제목을 통해 부모님 중의 어느 분일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고, 그분의 일생은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 대단원인 <그루터기>와 비유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죽어 돌아갈 자신의 미래에 대한 독백의 시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내 인생이 삶의 그루터기로 남을 수 있을까’하는 자기성찰로 독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셋째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연상케 하는 시이다. 병마와 전쟁놀이 끝내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즈음 ‘솔숲 휘파람 소리에 미소 짓던 한때가 기억에라도 남아 있을까’라는 회한이 서리어 있다. 비록 그것이 천상병 시인이 노래한 ‘아름다웠던 세상’이 됐든 아니면 ‘아프게 살아온 세상’이 됐든 <그루터기> 같은 내 삶의 흔적을 내면에 깊이 깔고 있다. 이제 음력의 한 해를 보내는 해걸음에 우리는 자신의 삶의 궤적에 대하여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눌산 윤일광문예창작교실 제공)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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